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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플랜 071 단테 신곡 연옥편 Purgatorio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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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플랜 071 단테 신곡 연옥편 Purgatorio

혜성처럼 2021. 4. 5. 16:58

단테 신곡 연옥편

 

 

 



강등당한 바울

 

지옥편 손가락으로 읽기 후 이제 눈으로 읽겠다고 펴든 연옥편.

벅차도다.

30분 단위로 끊어 읽지 않으며 읽다 졸기 일쑤고 ㅋㅋㅋ

그리고 연옥도 역시 보카치오가 그린 그림덕을 봤다.

단테와 비르길리우스가 만나는 ‘절벽’과 오르막길을 덕분에 잘 그려볼 수 있었다.

아직 분노산에 오르고 있는 중에 잠시 글을 쓴다.

 

 

 

 

연옥

로마카톨릭이 성경을 왜곡해서 상상으로 설정한 연옥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기에 단테가 만나는 영혼들의 고행이 모두 부질없이 보인다네.

아니지. 어쩌면 지옥의 또다른 이름같기도.

연옥과 지옥의 차이는 고통의 정도 만이 아니라 천국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의 차이다.

그건 말그대로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하지만 이 모든게 다 BULLSHIT!

 

로카 카톨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1세기 (예수 승천하고 바로 그 세기!)부터 기독교는 이단과 계속 전쟁을 해왔다.

놀랍지 않은가!

이단이 어찌 기독교 생성 초기부터 그렇게 극성을 떨었는지.

때문에 로마와 이스라엘 당시 베드로와 바울의 후계자들은 교리의 순수성과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그 싸움의 양상들을 전한 교회사들을 보다보면 정말 아슬아슬했고 그러면서도 당시 교회가 얼마나 지고지순하고 명민하게 대응했는지를 알수 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었을까?

내가 읽은 6세기 영국 전도까지의교회사에서는 어느덧 바울이 베드로보다 낮은 대접을 받고 있음을 본다.

물론 이스라엘과 로마 두 개의 상징적인 거점에서도 이스라엘의 지위도 강등되었구 말이다.

그때까지는 그게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를 했었다.

어찌되었건 베드로는 예수의 직계제자였으니까.

하지만 신약 27권중 13권의 저자로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집대성한 바울보다 육적인 관계를 우선시한 것에서부터 조짐을 읽었어야 했거늘...

그래. 이런 사정까진 단테와 상관 없었을 일이지.

다만 성경을 다 읽어본 단테가 연옥이 반성경인 란 것을 왜 알아채지 못했는지....

하긴 그렇다.

아무리 천재라도 나를 옭아맨 사고의 패러다임을 스스로 깬다는 건....

그러니까 천재겠지.

 

만일 내가 개신교도가 아닌그냥 무신론자, 하다못해 불교신자여도 연옥이란 참 정당한 개념으로 보이는 걸.

참 ‘인간적인’설정인걸!!!

그깟 과일하나 따먹었다는 죄로 온 인류를 죄인 취급한 쪼잔한 창조주에 비하면 참 배려심있는 징벌인걸...

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 내가 왜 연옥을 읽어야 하나 점검해본다.

시카고플랜에서 읽으랬으니까!

나라와 시민사회를 이끌어갈 역량있는 지성을 만들어가는데 꼭 필요한 양식이라 했으니까!

그래서 단테의 신곡은 단테가 당시 교계를 비판하여 가톡릭이라는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쓴 글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다.

여기 연옥 16곡에 그 핵심을 담아서 오히려 종교를 비판하고 당시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었을테니까!

그것을 단테가 의도했건, 안했건 실제로 연옥을 포함한 신곡 전권은 그렇게 어두운 중세에 억눌린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이후 여러 가지 민주주주의적 가치관들이 태동하기 위한 여명이 되어주었으니까!

그래서 16곡은 읽을 때 마음이 상쾌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연옥은 끝이 났다.

지옥편보다는 조금이나마 만만하려니 기대했는데 연옥도도 결국 손으로 그려가며 읽어야했다 ㄷㄷㄷ

연옥도 8단 케이크를 읽으며 올라가는 동안 번역자의 주석과 각 장의 해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지옥에서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하며 인간의 추악함을 보고해왔고

연옥에서는 새로운 인물 스타티우스가 그의 여정에 동참한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극적으로 역할을 교환하면서 신곡은 이제 마지막 천국으로 가는 길만 남겨 놓았다.

 

 

 

 

막판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이 역옥편의 하이라이트!

우선 28곡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스승 베르길리우스와 결국 이별하게 되는데 , 작별인사의 기회를 철없이 놓쳐버린 단테. 레테의 강을 앞에 두고 베아트리체를 보고서야 당황스레 스승을 찾아보는데 어느새 천국문 앞에서는 떠나고 없는 다정했던 안내자.

그를 추억하며 우는 단테를 베아트리체가 어찌나 호되게 나무라던지.

그래서 궁금해진거다.

남자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첫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베아트리체란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였길레 단테를 그리도 오랜시간 사로잡을 수 있었는가?

9살에 한번 그리고 또 십대 후반에 한번의 그 짧은 인연이 전부였거늘 어떻게 단테의 마음을 그리도 빼앗을 수 있었을까?

남자들에게 첫사랑이란 해소되지 못한 욕구의 다른 이름이라는 기본 입장이다만.

베아트리체와 단테를 그리 쉽게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비범한 지성과 영혼의 소유자 단테를 너무 무시하는 일일 게다.

그러니까 베아트리체의 눈에, 그 이목구비 어딘가엔 범접할 수 없는 지성미와 순결한 영혼이 깃들어 있었던가보다.

다들 살면서 그런 인물 한 두명 만나지 않던가!

이렇게 대단한 표현까지 적용하진 않더라도 내 고등학교 동기는 그 녀석의 속된 모습을 볼때마다 그렇게 고소하고 반가웠더랬다.

내 대학동기와 희생에 대해 토론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난 희생이란 것도 결국 희생하는 당사자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 친구는 희생은 희생이다. 자신을 버리는 거다!

난 그런 주장을 하는 친구에게 대놓고 가식적이라고 비난까지 했다.

실상은 늘 그 친구에게 자격지심을 가졌었다. 그 선하고 맑은 영혼에.

지금은 나라와 통일을 위해 전국구적인 헌신을 하는 녀석의 평생을 보면 나는 늘 작아진다.

 

범자는 범자끼리 놀고 비범자는 비범자끼리 알아보는 거다.

그게 내가 겪은 인간관계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날 그렇게 평생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충동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나에게 베아트리체와 단테가 28곡에서 32곡까지 보여준 모습은 비틀어버리고 싶을만큼 납득이 안되었다.

남자의 사랑이란, 단테의 사랑이란 지배가 아니면 그대로 순응하다 복종까지 하는 딱 고 수준이라고 말이다!

스승과의 이별에 서러워 우는 단테에 모질고 단호한 베아트리체는 마치 철부지 어린애 달래는데 고수인 어머니 같았다.

그렇게 단테를 정신차리게 하더니 단테는 그리하여 어찌나 지극정성의 존경과 숭배와 겸손을 다하여 베아트리체를 앙모하는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단테의 베아트리체나 베아트리체의 단테나 내 수준에선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눈으로 만난 사이란 것을 인정한다.

서로가 그렇게 만나도록 운명 지워졌다면야.

 

 

 

To Deum laudamus “그대 하나님을 우리는 찬미합니다.” p 420

 

내 영혼을 짓누르는 보다 큰 무서움은 오만 p 456

 

자유의지란 처음에 하늘과 벌인 싸움에서 혹독하게 시련을 겪었지만 잘 거두기만 하면 나중에 모든 것을 이긴다. p 482

 

자유로운 그대들도 그대들 안에 마음을 창조하신 보다 큰에나 보다 더 높으신 본성에 예속되어 있으나 하늘도 그 마음을 제어하시진 않는다오 p 482

 

Beati quorum tecta sunt peccata !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리워진자는 복이 있도다 ” p 597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p 638

 

헛된 상념들이 재능을 재우지 않았더라면 p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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