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홀릭
데미안.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민음사.2021 본문
두 세계
주인공 싱클레어.
부유하고 신앙심깊은 집안의 세 남매 중 막내.
유순하고도 깊은 감수성을 가진 열살짜리 소년은 어느날 악당 크로머를 만나고 지옥에 빠진다.
사내들의 치기.
그 대책없는 호승심이랄까, 자존심이랄까?
짓지도 않은 죄를 떠벌리다
그대로 호구잡혀 버린 것.
"나의 인생이 산산히 부서져 있었다."(p25)
「데미안」 이라는 문학사의 위대한 작품의 시작은 이렇게 산뜻하다.
기발하지 않은가?
순진한 어린아이가 짓지도 않은 죄로 덜미잡혀 생과 사를 오가는 곤욕을 치루는 장면이란!
내가 왜 어렸을 때 데미안을 안읽었을꼬 후회막급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그렇게 첫장을 마쳤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뿐 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p 10)
카인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왔다."
아이의 집.
아이가 그토록 평안을 누리는 밝은 세상의 본거지.
그 곳에서 오히려 아이는 끝모를 어둠을 겪으며 고통받고 있었다 .
너무나 안스러운 이 고난을 끝장내 준 사람은 데미안이다.
막스 데미안.
열두살 쯤 되는 나이라고 했는데 어쩜 말하는 것이며 행동 거지가 그렇게 의젓할 수 있지?
무슨 방법을 써서 프란츠 크로머를 저지했는지는 알수 없다.
싱클레어도 거기까지 알 바 아니다.
알 수 없는 건 진즉에 부모님께 털어놨으면 당하지 않았을 일을 데미안이 다 해결해 놓으니까 그제서야 실토를 했다는 거다.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셨겠노.
그래놓고 또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다.
데미안이 고맙다 소리 기대하고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인사는 기본이지.
고집스럽게 그 일을 꺼내지 않는 싱클레어나
그러려니 굳이 아는 척 안하는 데미안이나
이 범상한 독자가 보기에 둘 다 비범한 인물들일세 ㄷㄷㄷ
●악의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에 ,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있다고. (p 45)
● 돌 하나가 우물 안에 던져졌고, 그 우물은 나의 젊은 영혼이었다.
그리고 긴, 몹시 긴 시간동안 카인, 쳐 죽임, 표적은 바로 인식, 회의, 비판에 이르려는 내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다.(p 46)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세번째 장은 유난히 길었다.
나로선 그만큼 이해하기 힘든 싱클레어의 방황을 지켜보는 고통이라는 거다.
데미안은 '순진한' 싱클레어의 영혼을 이단 사상으로 효과적으로 감염시켜가고 있다.
그러나 데미안이 통찰한 것들은 이미 성경속에서도 보인 인간성의 실례들이다.
나역시 똑같이 체험했던 일이고.
p77에서 p79 에 이어지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긴 대화는 꼭 짚어가고 싶다.
싱클레어 하지만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유 의지라 없다고 말했쟎아 그런데 다시 오직 자기 의지만 확고하게 무언가에 쏟으면 된다고 말했지.
그러면 자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건 앞뒤가 맞지 않쟎아!
내가 내 의지의 주인이 아니라면 내 의지를 마음대로 이런저런 데로 향하게 할 수도 없는 것 아니야
데미안 예를 들면 나방이 자신의 뜻을 별이나 그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나방은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거야 .
그리고 바로 그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지.
자기 말고 다른 동물은 갖지 못한 마법의 육감을 개발하는거야.
우리도 얼마만큼은 정말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어서 그걸 벗어날 수 없어.
상상같은 건 해 볼 수 있지.
그러나 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나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내 본질이 정말로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문이야.
그런 경우라면, 너의 내면에서 명령하는 무언가를 네가 해 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데미안의 말인즉슨 나의 욕망이 강렬하게 나의 정신을 사로잡았다면 그 욕망이 추구하는 바대로 의지를 발휘할 수 있고 그 성취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일정부분 동의하고 참 신박한 논리로 보인다.
그러나 세 가지 부분에서 데미안의 논리는 이단적이다.
첫째 지(知)정(情)의(意)
우리의 인간 정신력의 삼원소다.
'정'이 '의'를 이끈다는 것. 여기에 '지'는 애초 논외가 된다.
이게 문제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일 수도)는 이 '정'을 '욕구'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소크라테스 선생도 분명 이성이 욕구의 우위에 있어야 올바른 정신이라고 말했다.
둘째 영혼육(Spirit + Soul + Body) 삼분설
앞의 지정의도 소크라테스의 이성도 결국은 기독교의 인간 3분설 중에 '혼'의 영역이다.
혼령의 그 혼이 아니고 보통의 인간 개성 실체를 드러내는 이성과 감정 두가지 자체를 말함이다.
죄는 바로 이 혼의 영역에서 이뤄진다. 물론 육신에서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바울)
마음도 육신도 온전한 성화의 길에 늘 장애물이 된다.
데미안의 지적이 , 싱클레어의 방황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루터가 그렇게 구원은 '외적인 거룩한 행동들이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믿음'에서 오는 거라고 그 개고생을 해서 종교개혁을 했는데 여전히 개신교는 율법주의에 매여있다.
청교도들이 그러했지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렇고.
그런데 그렇게 율법 잘지켰던 바리새인들이 예수 죽인거고 오늘날 예수 망신시키고 사는거쟎아.
종교란 이름으로 기독교 보호의 명분으로 극우반동의 길을 걷는 신사참배 친일배족의 그 원죄의 길을,,,,,,,,,,
근데 나도 복음 자체를 잘 믿지 못할 때가 많다.
구원을 넘어 구속이 관건이다.
The Redemption matters
한 친구가 그랬다.
니네 기독교는 왜그러냐?
뭐?
죄지었으면 무조건 용서받는다고 설교하쟎아?
우리교회는 안그래.
시간을 돌려 나의 등신같은 이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엉 그래 그래! 원죄도 용서받고 자범죄도 용서받고,
그렇다고 그말이 감옥에 안보내준다는 말도 아니고,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야.
인간 세상의 죄값이란 게 있는거쟎아.
라고 정정해 주고 싶다.
암튼 루터의 나라에서 태어난 헷세는 성경을 많이 오해했던가보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였도다" (예수)
뭐 아직 세번째 장이다.
그나저나 구도의 길에 방황은 필수이더냐
싱클레어가 제발 이제 방황을 끝냈으면 좋겠다.
나는 속터진단 말이다 ㅎ
●자신을 다스리고 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유복하게 자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이 자신의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p66)
● 많은 사람이 우리의 운명인 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삶에서 오로지 한번, 유년이 삭아가며 서서히 와해될 때 우리의 사랑을 얻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가려 하고 우리가 갑자기 고독과 우주의 치명적인 추위에 에워싸여 있음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다 .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것에,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 모든 꿈중에서 가장 나쁘고 살인적인 그 꿈에 한평생 고통스럽게 들러붙는다.
(p67)
●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 그건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p86)
베아트리체
탕자 싱클레어 그리고 영원한 구원자의 이름 베아트리체
김나지움에 입학한 싱크레어는 처음으로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떠나와 독립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싱클레어가 날마다 술집에 드나들며 학업도 내팽개치고 허랑방탕하는 모습은 이해가 안되었다.
정말 구도자의 길은 이렇듯 주지육림(싱클레어는 육림까진 가지 않았다 ㅎ) 에 놓여있는 것인가? ㅎ
그러다가 어느날 멋진 소녀를 만났다.
그여자에게 말한마디 걸어보지 않고 제 맘대로 그녀를 베아트리체로 부른다.
베아트리체는 참으로 대단한 남자들을 구원하고 다닌다.
단테도 천국으로 인도했고 우리의 싱클레어도 탕자의 삶에서 돌이켜세우다!
베아트리체는 첫 도미노가 되어 이후 싱클레어의 삶을 회복시킨다.
알고봤더니 베아트리체는 데미안이었다더라.
아니 싱클레어 자신이었대더라.
사실...
데미안 이 책이 들고다니며 읽기는 좋은데 (얇으니까) 영 어렵고 지루하다.
구상화가 아니라 추상화랄까.
때문에 이럴 경우 필사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아, 가야할 길이 멀어서 좀더 꼼꼼히 읽어보자 ㅠ
●나는 부서진 삶의 한 시기의 폐허들로부터 자신을 위해 하나의 환한 세계를 지으려 더없이 열렬하게 다시 노력했다.
이 환한 세계는 어느 정도 나 자신이 창조한 것이었다.
나 자신이 창안하고 요구한 새로운 예배, 책임과 자기 기율이 있는 예배였다. (p 107)
● "운명과 심성은 하나의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이름이다. " (p 112)
●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아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p 116)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싱클레어가 어느날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바흐 음악에 빠져든다.
그리고 만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
그는 마치 데미안이 대언자로 보낸 사도같은 사람이다.
싱클레어에게 인식의 불꽃을 점화시키는 데미안처럼 그도 싱클레어의 영혼의 고뇌를 격려해준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을 나도 들어보고 싶다.
아, 피스토리우스가 연주한 곡도 바흐라 했는데 무슨 곡인지는 안나왔다.
● 사랑은 더이상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또한 경건하게 정신화된 숭배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하나가 되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전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보였다. (p126)
● 당시에 나는 우연에 의해 특이한 도피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런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면 그것은 그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그를 그것으로 인도한 것이다.
(p130)
●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하는 게 큰 차이지.
세계가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한 그루 나무거나 돌인 거지. 기껏해야 동물이고.
그러다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 때서야 인간이 되지. (p 141)
야곱의 싸움
피스토리우스 아무것도 무서워해서는 안돼.
영혼이 우리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말하지 마
싱클레어 생각하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잖아요.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여서는 안되잖아요
피스토리우스 상황에 따라서는 죽여도 돼.
머리에 스친 모든 생각을 그냥 행동으루옮기라는 게 아닐세.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건 아브락사스임을!
자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그 사람 당사자가 아니야.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한거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p149)
이 것은 위로였다.
아브락사스가 뭐가 됐든지간에 피스토리우스는 제대로 싱클레어의 마음을 만졌다.
청년의 자연스러운 육체의 욕망이 꿈속에서 근친상간의 부끄러움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던 싱클레어.
그러나 그 욕망을 죄악시하지말고 너만의 비밀스런 의식으로 꺼내놓고 직시하라.
인간 안의 불온한 욕망은 너 때문이 아니라 아브락사스때문이야.
아 싱클레어여 피스토리우스여
이것도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말이쟎아요(로마서)
'다 니가, 우리가 죄인이라서 그래.'
이 말은 비난이 아니라 긍정의 격려 자체다.
만인평등죄인설
사도바울도 세례요한도 죄인이었지.
칸트는 알았던거같다.
인간본성의 그 끈질긴 자기애와 또 추악함을.
그래서 온전한 선의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선의 속에 감춰진 영적 허영과 자기만족을 알았던거다.
그러니까 ' 무정한 인간의 자비' 론으로 완전무결한 선을 설정할 수밖에
중요한 건 이 모습 이대로란 말을 드디어 싱클레어가 받아들였다.
오늘날 나도 다시한번 그리하길 빌어본다.
나역시 끊임없이 무기력감을 느낀다.
그마나 예배생활 복음듣기생활을 강제적으로 하고 있었기 망정이지
내 정신은 진즉에 고비사막이 되었을거같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번역자 후기에 이 말은 로마건국신화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에바 부인
나는 감당을 못하겄다 이 노무 신비주의!
카인과 아벨의 새로운 해석은 그저 상징이려니 했다.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안에 있다는 달콤한 말도 싱클레어의 방황 중에 만난 유혹일 뿐이라고 믿었다.
그의 베아트리체 그림이 데미안이 형상화한 것이란 사실도 그려려니 했다.
자살하려는 친구를 극적으로 구해준 일도 운명의 이끌림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 에바부인과의 만남으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가 그리고 대화나누고 숭배해왔던 베아트리체는 에바부인 곧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대학가에서 데미안과 조우했을 때 데미안은 이미 그를 의식하고 있었더랜다.
결정적으로 실제 만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
그녀는 단순히 데미안의 어머니가 아니라 데미안이 전도한 아브락사스 종교의 여사제였다.
보통의 친구 어머니와 같지 않은 신비스러운 그녀의 태도.
그리고 꿈 이야기
프로이트가 밝혔지.
인간의 무의식속 복잡한 세계에 대하여.
그러나 프로이트는 과학자였다.비록 무신론자였어도!
나도 처음엔 프로이트처럼 싱클레어의 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꿈이 특별한 계시라도 되는 듯이 접근하는 세 신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마지막장이 종말이란다.
아직 싱클레어의 나이 스무살일 뿐인데
무엇이 그의 방황과 첫사랑과 평생의 우정에 종말이 된다는 소리일지?
●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테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 짓기일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p 180)
● 어쩌면 우리도 함께멸망하겠지.
우리에게서 살아남는 자들 주위에 미래의 의지가 지결되겠지.
우리 유럽이 한동안 자신의 기술 및 학무의 대목 시장을 펼쳐놓고 소리소리 질러 대는 통에 들리지 않았던 인류의 의지가 드러날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인류의 의지가 결코어디서도 오늘날의 공동체들, 국가들과 민족들, 협회들과 교회들의 의지와 가지 않다는 게 드러나겠지. (p 181)
● 또한 내가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는 사실, 반짝이는 색채들의 상실은 유년의 상실과 불가피하게 연관된다는 사실, 영혼의 자유로움과남성다움을 이 아름다운 광채의 포기로어느 정도는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감수하는 데도 익숙했다.(p 181)
● 나는 매혹되어 인식했다.
그 모든것이 다만 엎질러지고 어두워져 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유년의 행복을 포기하고 자유로워진 사람도 세계가 빛을 뿜는 모습을 바라보고 어린이다운 시각의 내밀한 전율을 맛볼수 있다는 것을. (p 184)
● 인류가 가는 길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었기 때문에 , 오로지 그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고영향을 미 칠수 있었어. (p 194)
종말의 시작
마지막장 제목. 종말의 시작.
많은 뜻을 담은 제목이다.
종말이 시작이다.
종말같은 시작.
혹은 시작같은 종말.
무엇이든!
스무살의 싱클레어는 비록 전쟁중 큰 부상을 입었지만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이미 그부터가 참여해있는 전쟁과 전투를 통해 전쟁이란 것이 세게의 종말만은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닥친 부상과 통증은 자신이 새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이란 것이다.
● 얼마나 기이한가, 지금 세계의 흐름이 더 이상은 그 어딘가에서 우리를 스쳐 가지 않는다는 것ㅇ, 그것이 지금 갑자기 우리의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간다는 것이, 모험과 거친 운명들이 우리를 부르며, 지금 아니면 머지않아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스스로를 변모시키려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p 212)
●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생성되고 잇었다.
새로운 인간성같은 무엇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중 어떤 이들은 바로 내 곁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여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 p 215)
● 그들의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히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서져야 했다. (p 215)
●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내려가면,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내려가면 그고에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있었다. 그와,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p 219)
마지막장에서 토마스 만의 「마의산」이 떠올랐다. 데미안보다 5년뒤 발표된 소설이다.
거기서 한스 카스트로프도 전쟁에 종군했다가 말그대로 소설과 주인공 인생 자체의 종말을 맞았다.
민음사 「데미안」 뒷면 커버에 토마스 만의 추천사(?)가 있다는 걸 방금 알았다.
데미안이 자신의 내면안에서 무한정 관념, 상념 ,그 무형의 것들을 붙들고 투쟁하는 모습은 한스 카스트로프 역시 알프스 가문비 나무 너른 그 높고 추운 곳에서 치열하게 진리를 찾아 고군분투해온 모습을 떠올린다.
나는 카인의 후예가 아니라서
이 비범한 자들의 의식세계안에서의 길고긴 여행과 투쟁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혹시나 내가 싱클레어였다면 나 역시 데미안을 흠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나를 친구로 껴주지 않았을 것이다 ㅋ
데미안은 분명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것을 인도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그만큼의 이성이 받쳐주고 영혼의 내면이 깊은 자라야 감당할 시험일 것이다.
나는 아주 아주 감정적이고 토끼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예민하긴 하지만 고통을 오래 감당하진 못한다.
생각도 그리 길고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아주 투명한 사람이다. ㅎ
내 내면과 겉이 말이지.
어렸을 때부터 나도 이런 내 성정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졌던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본능적으로 동경하고 경외하는 사람이 좀 있었다.
대학때 희생에 대해 논쟁을 나누었던 친구가 있다. 나는 존경과 질투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지녔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내게 데미안처럼 깊은 공명을 주는 사람을 그렇게 많이 만나지는 못했다.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 있고 끼리끼리라고 하지.
내가 누군가 나쁜 사람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있다면 그건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라는 주의다.
그래서 평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암튼 실제로 나는 나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 주위엔 데미안 같이 깊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 없었나보다 ㅋ
역시 헤세는 괜히 헤세가 아니었다.
다 읽고 나니까 이 책 표지 커버에 헤세의 다른 책 광고가 눈에 띈다.
「나르치스 와 골드문트」.
이 책을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더라는 내 무의식 저편의 기억이 떠올랐다는 거다 ㅎ
내가 이 흔하고 유명한 명작소설 「데미안」을 기피한 이유가 다 있었엉 ㅋ
내가 소화하기 어려웠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래도 책 하나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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