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홀릭
국어교과서가 사랑한 중학교 소설읽기-중1둘째권.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 해냄에듀.2019 본문
교사들이 교과서를 돕는 책을 만들다
출판사 이름을 보니까 얼마전 역사교사들이 모여 만든 책이 기억났다 !
이 책도 여기「... 중학교 소설읽기」만한 판형이었으면 좋았을 걸!
암튼!
나는 이렇게 현장의 교사들이 교과서를 보조하기 위한 훌륭한 '참고서' 들을 만드는 사례를 두 번째 만난 셈이다.
이름하야 전국국어교사모임.
소속 집필진에 강양희, 강현, 김상용, 김언주,김종수,김지령,안용순, 윤기자가 있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나란 보통사람은 국어교사모임이라니까 그저 위대해 보일 따름이다.
현덕, 「하늘은 맑건만」
이청준, 「연」
이금이, 「촌놈과 떡장수」
황순원, 「소나기」
허균/권순긍 풀이, 「홍길동전_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헤르만 헤세, 「나비」
[교과서 밖 소설]
문영숙, 「그래도 나는 피었습니다」
차오원쉬엔/전수정 옮김, 「대머리 소년」
[북한 교과서 소설]
강훈, 「까까머리 학생」
그리고 총 아홉편의 위대한 작품!
교과서에 실렸다면 말 다했지.
내가 아는 건 「소나기」밖에 없구나
교과서의 힘
내가 아는 상식과 지식등은 학창시절의 교과서 지식밖에 없다.
회사생활 하면서부터 그렇게 책 많이 읽고(^^;)
SNS 쳐해대고 유튜브 쳐보는데도 머리에 남는 게 없다.
1박2일에서 멤버들보다 한 두 문제 더 맞추는 수준이라는 거 ㅋ
그나마 학창시절의 생생한 교실 안 풍경
그 속에서 시험을 위해 열심히 읽고 듣고 외웠던 것들이 오늘날 내 교양의 전부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 비스무리 놀랐던 경험
모국어가 배우기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해서
지식을 흡수하는데에도 결정적 시기가 있는건 물론 아니겠지.
다만 그만큼 학습 자체에만 집중한 효과는 그 어느 시기보다 달랐을 것이다.
무엇보다학창시절의 나는 교과서를 좋아하기 까지 했다.
국어교과서, 도덕교과서, 사회교과서는 자체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새 학기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 이 세 교과서는 미리 다 읽었다.
그중에 특히 국어교과서.
정말 많은 문학작품이 수록되어있었다.나는 피천득의 메모광과 나타니엘 호손의 바위얼굴 그리고 황순원의 소나기를 정말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다기보다 지금도 교과서 문학하면 이 세가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물론 시랑 시조도 엄청 많았지
외울려고 들어서 외운게 아니라
그만큼 문제집도 많이 풀고 하다보니
어지간한 핵심구절들은 요즘에선 더욱 저절로 소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설렌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새삼 성적을 발휘할 일도 없고 그래서 어떤 강렬한 목표의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 거기다가 점점 퇴화하는 지적능력때문에 괴로운 지금이지만 그냥 순수한 문학감상의 차원으로다가 즐겨볼란다.
「하늘은 맑건만」
작가 : 현덕. 본명 현경윤. 1909~ ?
한국전쟁 중 월북
「고구마」「모자」「나비를 잡는 아버지」,「광명을 찾아서」
얼핏 헤르만 헷세의「데미안」을 떠올리는 플롯이다.
싱클레어는 짓지도 않은 죄를 지었노라는 허세에 발목잡혔고
주인공 문기는 우연히 들어온 공돈이 미끼가 되었다.
1940년대 일제시대 배경이니 요즘 안쓰는 옛말과 낯선 단어들이 좀 있다.
나는 어째 자연스레 1970년대 방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영화. 반의어는 외화) 에서나 들었던 서울사투리로 자동음성녹음이 되어 읽히더라 ㅎ
지금 들으면 촌스러운 그 말투로 읽으니 한결 정감이 가고 이야기가 극적으로 변한다 ㅋ
점점 거짓말과 나쁜 손버릇의 수렁에 빠져드는 문기.
과연 탈출구가 있을까 싶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문기는 오늘날 말로 하나님의 보우하심을 입는다!
이런 걸 보면 아이들 세계는 투명하고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어른과 똑같이 치열하고 음습하다.
그러니 문기에게는 삼촌이 하나님이 되는 거다.
얼마나 식겁했겠노.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어른들은 어떻게 유혹과 죄악과 음모의 수렁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서스펜스와 스릴 오지는 드라마 !!
「연」이청준
「촌놈과 떡장수 」 이금이
신기하다.
내가 이렇듯 책을 집종해서나 몰아볼때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내 독서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지금 「연을 쫓는아이」(할레드 호세이니) 와 도 병행독서중이다.
연쫓는 겨올철 민족이벤트 에피소드가 나왔을때 여기 「중학교소설 읽기」목록 두번째 제목이 떠올랐던 참이다.
주말동안 들고다니며 이동하는 교통편 안에서 읽다보니 진도가 제일 많이 나간 책이다.
오늘 세번째 「촌놈과 떡장수」는 영락없이 아미르와 하산을 떠올리게 했다.
하산을 무시했던 아미르처럼 촌놈도 광식이와 헤어지고 나니까 광식이란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친구관계든 , 나이가 어리든 모든 인간관계에 어려있는 주종관계를 보게 된다.
그건 사회적, 사상적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적, 혹은 기질적 차이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나도 어린 시절 친구들 무시 많이 했었다.
반면에 나는 무시받으면 가만 못있는 개차반 성질이었다.
중학교 때였나?
날 시기하던 놈이 가만있다 열폭해서 내 앞에서 지랄을 떠는데 난 충격이란 걸 먹었다.
가만 당하다가 뒤늦게 나도 천불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학교를 안갔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가 학교를 결석한 사달을 일으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큰 효과는 없었고
그 녀석과는 흐지부지 되버렸다.
이런 일이 고등학교 들어가서 두 번 또 있었다.
한 놈때는 약간 뒷북이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조용한 야자시간에 나도 만만찮게 지랄말발로 걔를 공격했다.
그러나 효과는 역시 별로 없었달까?
걔야 말로 나에게 느닷없는 악다구니를 쏟은 걸로 지 속에 뭐가 있었던 그 속풀이가 이미 이뤄졌던 건지 큰 반응이 없었다.
아니면 그때 내가 너무 오버옆차기에 당시 교실분위기에서 나와 맞장구 치지 말잔 말이었는지.
인생의 아이러니는 이 친구와 이후 고등학교 졸업해서 대학졸업까지 베프가 되었다는 것.
아, 대학은 각자 지역자체를 달리갔지만...
글고 고딩때 또 한명.
얘는 내가 어떻게 맞대응을 했던가 기억이 안난다.
아마 당시 얘랑 부딪히지 않은 애가 전교에 없었다는 이유가 갸를 용서하는 사유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공부잘하고 이뻤지만 난 다른 이유로 동경하기까지 했던 친구다.
그냥 온 몸에 여성스러움이 흐른다.
지적인 여성스러움.
손가락도 하얗고 가는데 말할때 손짓이 참 독특하다.
그 가늘고 긴 손가락 다섯개를 세워서 모은다.
내게 가장 쇼킹한 도전을 준 건
그애 하숙방 책상의 거의 모더니즘적인 정리상태!
아마 그때부터 나도 수납과 정리에 꽂히게 된 듯!
사람은 그러니까 친해지는 과정에서 어느순간 불쑥 부정의 찌꺼기가 솟구치는 순간이 있나보다.
부부는 그런 걸 권태기라고 하지.
그러나 권태기가 꼭 부부관계에만 있는 거 아니더라!?
나는 3년 고등시절에 이걸 겪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특히나 입학하기 두 달 전부터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붙어있어야 했다.
중간에 점심 먹고 저녁 먹는 시간만 각자 생활공간에 흩어진다.
누군가가 약한 고리가 있어 쌓인 스트레스를 다른 약한 자에게 터뜨리는 류의 사람이 있고
고스란히 배수구 역할을 당하거나 하는 수가 있는 거다.
나는 성질이 못되서 마주 당하지는 않았던 거지
거 왜 온순하고 기질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있잖나!
나?
난 기질적으로 나내고 들쑤시고 폭발하는 형이었던 듯!
그래도 내겐 열정 쏟아붓고 터뜨릴 데가 많았다.
테이프 늘어질때까지 들어대는 왼갖 장르 음악, 야자 땡까고 자리잡는 만화방,
소설쓰기 , 시쓰기 , 죽어라 이 사람 저 사람 짝사랑 해대기, EBS광고 등
그리고 놀랍게도 세 번째 친구와는 졸업때까지 사이좋게 잘 지냈다.
다 한때였던 거다.
아마 친구들은 내가 순딩순딩하고 그저 유쾌한 사람인줄만 알아 나에게 권태기의 밀린 악을 쏟았나보다.
근데 내가 고분히 안받아줬던 거지.
지금은 조큼은 의도적으로 안받아준다.
조금 더 나가면 진짜 너무 경우 없어질것 같아 제동을 건다.
나도 화를 내는 것으로써.
사람은 잘해주고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 제어를 해야하는데 그걸 못하더라.
이 두 작품 덕에 지나간 추억이 떠올랐다.
이런, 넘 위험해 ㅎ
「소나기」황순원
그러니까 내가 「소나기」의 전문을 다 안읽었단 거다?
전체 스토리와 마지막 단락은 기억하지만
중간중간 에피소드들은 처음 보는 듯.
아마 교과서에는 축약본을 담았나보다.
뭐 아님 내가 까먹었거나
마지막 ' 잔망스러운' 소녀의 유언으로 끝날 때 소설가는 벼랑같은 최고점에서 독자를 느닷없이 아래로 추락시켜버린다.
으아아아아악 비명같이 충격과 감동의 바다로 떨어지는 거다.
소나기!
그러니까 우리 민족에게 소나기는 영원한 첫사랑의 클리셰로 자리잡았단 거 아녀ㅎ
그리고 잊혀지지 않은 명대사
"이 바보" (p60)
" 난 보랏빛이 좋아"(p64)
" 글쎄 말이지.
이번엔 꽤 여러 날을 앓는 걸 약두 변변히 못 써봤더군.
지금같아서는 윤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더노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 달라구……."(p 73)
☆ 소녀와 꽃
갈꽃
쑥부쟁이
구절초
쑥부쟁이나 구절초가 보통 들국화로 불리는데
'들국화' 라는 딱 하나의 꽃은 애초에 없다더라.
그외 감국, 산국 도 이 둘과 함께 산에 피는
국화 곧 들국화래더라....
싸리꽃.
콩과 식물로 예전엔 흔했다더니 요즘엔 보기 힘들다고? ㅜ
그리고 도라지꽃
이상
소녀의 꽃이었습니다
「홍길동전」허균/권순긍 풀이
전문은 아니다.
중간에 홍길동이 어머니를 시샘하는 다른 첩의 간계로부터 어머니늘 구하는 장면,
일곱의 가짜홍길동을 만들어내 여덟이서 팔도를 휘젓는 장면은 생략되었다.
나는 뒤늦게 '권순긍 풀이' 를 발견했다.
맞다.
원문 소설은 당시 국문소설이나 구한말 창가시절까지 빈번했던 한자어와 우리 옛말의 혼용으로 쓰인 소설이었다.
원문에 '호형호제' 란 말이 그래서 나온다.
중학교 교과서에 오리지날 국문소설이 실리지 못할 것 또 무언가 많이 섭섭해졌다.
이러니까 '사흘'과 '3일'을 구분 못하는 문해력 장애가 나오는거지 ...
어찌되었건 홍길동전은 짜릿한 영웅무용담이다.
광해군 시대 조선 관제, 생활상, 지역풍속을 알수 있는 귀중한 사료도 되고.
「나비」 헤르만 헷세
나비 수집에 열광하는 주인공.
그에겐 경쟁자겸 시기하고 있는 옆집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역시 나비수집에 열심이고
수집물의 양과 질에서뿐 아니라 관리까지도 독보적으로 탁월하다.
심지어는 주위 나비수집광 친구들 누구도 찾지 못한 점박이 나비란 것을 애벌레로부터 직접 키워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걸 보러갔다가 훔치기까지 하는 주인공.
뒤늦게 아차 싶어 돌려줄라고 했더니 나비 수집품은 산산히 바스라져 있었다.
이 참상후 한참을 고민하다 잘못을 실토하는데 친구로부터 모멸감을 얻는 주인공.
주인공은 결국 나비수집 취미를 포기하기로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 대한 간접경험'
이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한다.
나는 어째 요즘 세대에게 이것이 잘못 읽힐까 걱정이다.
아끼는 소유가 망가진 피해자의 상실감과 분노이전에 주인공이 사과 후 받은 모멸감과 상처에 더 집중한 구조같단 말이지.
예전의 경험이 떠오른다.자기 차앞에 내 차 때문에 차를 못뺐다고 내가 사과를 했는데도
한참이나 씩씩 거렸다.
그러니 나도 억하심정이 올라와 그럼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적반하장인 게 맞다.
잘못은 잘못이었다.
이 반대의경우를 겪은 적도 있다.
버스가 승차거부를 하고 쌩 지나간다.
뒤에 있던 다른 버스기사가 안됐는지
빨리 타서 쫓아가 잡으라고 격려해준덕에
앞선 정류장을 지난후 신호대기중이던
버스를 잡아탔다.
딱 일주일전 같은 시간대 버스였길래
연거푸 같은 노선버스가 승차거부 한것의 분노를 이날 하루 몰아서 쏟아 따졌다.
그랬더니 지난번은 자기 잘못 아니고
왜 손님앞에서 큰소리냐
왜 차를 치느냐 나중에 더 큰소리다.
(차를 친건 차를 붙잡을려고 )
그러더니 이후 혼자 계속 발동해서
더 난리를 친다.
어디 소속이냐, 내려서 얼굴좀 보자
드러워서 못해먹겠다.
그러다니 어따가 전화도 해서 그만둔다 큰소리로 통화 한후,
이제 이 일도 그만두었으니
본격 따져보자 큰 소리.
녹음도 다 따놓고 회사에 신고하거나
경찰서에 신고할 것을 다 별렀다.
이번엔 절대용서하지 말아야지 했다
(지난번 승차거부 신고는 당시 오전 9시 전이라 못했다)
그래놓고 또 내 일이 급해 점심시간을 기약하며 미뤄뒀다.
그러나 일하는 4시간 내내 고민했다.
내가 왜 없이사는 사람들끼리 싸워야하나 자괴감이 첫번째였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란 말씀은 내 삶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래도 분이 안풀리고 앙금이 남는 걸
이후 교회 지인들과 이야기 나누며 풀었다.
마지막 남은 찝찜한 한가지는
그 기사가 회사로 아무 신고 안들어온것에 대해
자기가 그렇게 험악하게 진상떨어서 승리한것으로 알면 어쩌나 , 내가 진걸로 알면 어쩌나 하는 치기가 또 올라왔다.
계속 기사랑 설전을 하다 하나 있는 다른 손님이 미안해서 난 꾸욱 참고 아무말 안하고 있었거든.
이걸 이기기가 참 힘들었는데
그건 기도로 버텼다.
그러고 보니 날 도와준 좋은 기사님도 계셨는데 그분께 갚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
근데 이 돌대가리 , 그 버스 노선을 모른다 ㅠ
아무튼
잘못한 건 잘못한거다.
자존심이 상하면
잘못을 제때 인정하고 사과를 진심으로 하는 것으로
좋은 사람 노릇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면 되지 않나?
분노는 잠깐이지만 잘못은 오래가서 내 인격을 비틀거리게 한다.
사과로 털어버려야 한다
「그래도 나는 피었습니다 」문영숙
이제부터는
교과서에 실리진 않았지만 '교과서가 눈여겨 보고 있는'(p5) 작품 두 편이 나온다.
그 첫번째 작품의 작가는 이력이 눈에 띈다.
'청소년들이 잊지말아야 할 우리 역사를 알려주는 소설' 을 주로 쓰고 있다고.
그리고 다음장을 넘겼더니 뙇~
「그래도 나는 피었습니다」는
사라진 외할머니의 흔적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 '나눔의 집' 서 발견한 손녀딸이 할머니가 남긴 구술집으로 할머니의 아픈 과거를 대면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걸 액자식 구성이라고 한다 .
책에 나온다 ㅎ
겨우 열세살 소녀가 초경도 치루지 못한 몸으로 위안부로 고생을 한다.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로 납치하듯 끌고가놓고 말로 다 못할 그 고생을 하고 와서 뒤늦게 동료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싸워왔던 모든 기록이 내내 눈물나게 한다 ㅠ
나는 이 이야기가 왜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을까 안타까웠다.
문영숙 작가는 또한 파독광부 이야기도 소재로 삼았다고 했다.
문영숙 작가의 여정에 대해 계속 알고 싶어졌다
문영숙
차오원쉬엔/전수정 옮김,
「대머리 소년」
외모를 가지고 놀림당하다 왕따까지 겪는 주인공.
그의 모든 울분과 비애가 남일같지 않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축에는 반 친구들 빈 아니라 정육점 주인, 담임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류허는 물러서지 않고 고깃덩이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거나 학교 중요행사를 망쳐서까지 자신을 놀리고 대머리를 문제삼는 모든 이들에게 저항한다.
그러다 학교 연극대회서 대머리인 것을 활용해 주요배역의 연기를 무사히 마치고 대회를 성공리에 이끈 주인공은 오히려 무리에서 빠져 혼자 있다.
교장 선생등 선생과 학생 모두가 찾아나선 가운데 말없이 뚝뚝 흘려대는 눈물로써 그 간의 서러웠던 마음을 토해내는 류허.
친구들도 함께 울면서 류허와 친구들은 마침내 쌓인 앙금을 다 털어낸다.
감동이야 ㅠ
넘 낭만적인 결말같기도 하다만 그 사이 악동들이나 어른의 대응도 그만큼 사실적이긴 했다.
그러니까 이런 결말이 더 의미가 있는 거같다.
현실에선 얼마나 나와 다른 차이로 남을 무시하지않고 긍정할 수 있을까
당시 중국도 우리처럼 아직은 공동체가 살아있어 철없는 아이들의 잘못을 마을 어른들이 함께 혼내는 훈훈한 장면도 좋았다.
「까까머리 학생」 강훈
북한 교과서 수록작이다.
이야기는 굵고 짧다.
까까머리로 반 친구들로부터 놀림당하는 이야기는 앞선 「대머리소년」과 비슷하다.
친구들의 놀림은 수업중에도 이어져 분필이나 돌덩이를 머리통에 대고 던지기까지 하는 위험한 폭력으로까지 번진다.
결국 수업중에 유리창이 까지는 사달이 나고 선생님이 누구짓이냐 추궁한다.
그런데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나서서
자기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놀라는 아이들.
"선생님, 제 머리가 깨뜨렸습니다. 우슬럭두슬럭한 제 머리가 유리창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제 머리를 깎은 어머니는 죄가 없습니다. 웃음받게 생기고 미움받게 생긴 제 머리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p173)
놀라운 전개!
어찌 중학생 입에서 이런 성자다운 발언인 건가!!
그리고 이어 진짜 주범이자 평소 주인공과 앙숙이던 악동이 이실직고하고 나선다.
교실은 금새 미담 가득한 훈훈한 분위기가 되고 둘은 사이좋은 친구로 거듭난다.
오로지 교훈적인 의미밖에 보이진 않지만
엄마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려는 모습, 친구들의 예상가능한 놀림에 나름 대처해내려고 한 지혜에서 나온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이해도 가고 흐뭇한 마음도 든다.
모름지기 교과서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 「양육쇼크」에서 독서교육의 잘못된 사례를 기억한다.
싸우고 다투다가 반성후 착해지는 레퍼토리는 어린아이의 뇌에 전혀 교육적이지 않은 효과를 낳는단다.
이런 모습 본받지 말라고 싸우는 예시를 들었던 것인데 뇌는 그 반어적 의미보단 눈에 보이는 대로 입력을 하고 모방효과를 일으킨다는 거다.
그러니 아이들의 짖궂은 모습이 잠깐 나오지만
앞서 말한대로 엄마에게 버릇없이 쨍쨍이는 장면이 없는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북한교과서 한자락을 이런 기회 아니면 또 언제 들춰보겄노
공유가 쌓이면 공감도 느는거지
이런 게 통일교육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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