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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단편선. L.N.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인디북.2001

혜성처럼 2023. 5. 19. 20:16

 

 

-목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
두 노인
촛불
바보 이반
어떻게 작은 악마는  빵 조각을 보상하였는가
달걀만한 씨앗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대자(代子)
머슴 예멜리안과 빈 북
세 아들


위대한 사업가 톨스토이


드디어 읽는다.
「전쟁과 평화」, 「부활」등
웅장한 제목만큼이나 거대한 서사를 자랑해온 이 위대한 작가의 단편모음.

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짧은 만남밖에 없다.
아!
「안나카레니나」도 있구나!
그러고보면 그가 쓴 예술론 그대로의 작품 스타일인것을 이제 좀 알겠다!

'예술은 쾌락도 오락도 위안도 아니다.
예술은 위대한 사업이다.
예술은 인간의 이성적 의식을 감정으로 옮겨놓는 인간생활의 한 기관이다
( p259. 이철 번역. 범우고전선)

이러니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이 온통 바르고 건전한 삶을 사느라 바빴고요, 그걸 읽는 나란 독자는 많이 지루했었더래요 ㅋ

여기 단편선 제목들도 딱 울 교회 설교 피피티 에 띄워진 제목같다 ㅎ
이야기는 주어진 제시어에 맞는 해답이 풀어져 나오리란 것.
나는 나는 그래서 설교 말씀 듣는 양
고분고분 읽고 있을 수 밖에ㅎ

그러나 더 내 마음에 아멘하고 울림이 되는 건
톨스토이가 그려낸 군상들의 그 하나같이 따뜻함이다.
오헨리는 본능적으로 인간의 순수함을 믿었다면
톨스토이는 연약하기에 그들이 보이는 인간미가 더욱 가치있어 보이게 했다는 거다.

이러니 읽는 내내 내 마음이 노골노골해진다.
지금까지 톨스토이는 강하고 엄한 사람같이 느껴졌는데 여기 「단편선」 을 통한 톨스토이는 온유한 사람일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된다.

나는 날것의 생식같은 수필이나 에세이보다
이렇게 정갈하게 차린 단편이 훨 좋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열 두 펀의 짧은 이야기를 만나는 시간.
행복했다

느낌표 선정도서

 

옛날 이런 바람직한 프로가 있었다 ㅎ
김용만만 기억나네?
여기 선정된 책은 이후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전국민 서가에 꽂히게 된다.
아마도 '느낌표 선정도서' 한권 이상 안 산 사람 없었을껄?
(여기 내가 있다 ㅋ)

잔잔한 그림도 있고
입말이 살아있는 번역도 좋구.
덕분에 좋은 책 잘 만났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물어 봤어?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거야!

라고 팍! 대답을 하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다!
이야기 소개 차원으로다가 주인공 구두장이 세몬이 어느날 만난 사람이 누군지 말을 하면 완 전스포일이 되버린다 ㅎ

중요한 건 꿈과 환상의 요술 그 쪽의 분위기 보다는
우리네 전설의 고향같은 신비함과 수수께끼 가득한 멋진 동화다!

마음이 콱 마 몽글몽글해져요


사랑이 있는곳에 신도 있다.


평생 박복한 인생에서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온 주인공 마르틴.
그러다 신실한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시 하나님과 화해한다.
매개가 되어준 건 꼬박꼬박 읽어간 신약성경.

어는날 읽었던 말씀에 은혜받고 묵상하다 기도로 마무리까지 하고 잠든 그 새벽
꿈결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경 말씀대로 마르틴을 찾아오겠다 하신다!

이쯤되어 떠오르는 성경구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장 40절)

외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럴 머리는 못되고 ㅎ

암튼 이후 스토리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오매불망 주님이 오시려나 목을 빼고 창밖을 내다보는 중에 가난하고 추위에 떠는
두 ' 이웃' 을 만났다.
그리고 또 한 ' 이웃들' 에게는  싸움을 중재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둘 다 변화를 시켰다.

나는 혹여나 주인공 마르틴이 저녁까지 헛탕친 후에 번뜩 내가 이미 만났었구나!
깨닫는 결말일 줄 알았지 ㅎㅎㅎ
톨스토이는 나보다 훨씬 자상하게 사랑과 헌신의 가치를 상기하도록 했다.
고전주의 리얼리즘인줄 알았더니 판타스틱 설화였네요^^;;;


불을 놓아두면 끄지를 못한다

 

● 만약 그 사람만 심술궂고, 너는 착한 사람이었다면 싸움같은 건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을게 틀림없다.(p98)

싸우지말라
니 탓 내 탓 부질없다
어차피 똑같은 사람끼리 싸우는거다
똑같은 죄인들이니 예수님 말씀 들어
용서하고 품으면 그만이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설교다.
그걸 소설로 극화해내기가 어려운 거지.

참 좋은 우화 한 편!

 

두 노인


두 노인이 있다.
예핌 노인은 키가 크고 풍성한 머릿결을 자랑한다.
예르세이 노인은 키가 작고 대머리다.
예핌 노인은 나이가 많은데도 여전히 정력적이고 일 욕심이 많다.
예르세이 노인은 작은 살림일 지언정 분수껏 여유롭다.

그리고 두 노인은 친구다.
함께 성지순례까지 계획한 믿음 신실한 동지다.

그러나 예핌노인은 가는 날까지도 집안걱정이 많다.
그 많은 가족들에게 일일히 많은 일들을 꼼꼼히 일러두었는데도 말이다.
예핌노인은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일이다 생각하면 스스로 궁리해서 해낼것이라 믿는 거다.

막상 본격 성지순례길
예핌노인은 큰 키로 성큼성큼 빠르게 걷는다.
예르세이 노인은 예핌 따라잡기가 넘 힘들다.
이 둘은 이렇듯 계속 대조적인 행보다.
마침내  두 노인은 어느 흉년들어 몹시 흉흉해진 마을에서 헤어진다.

에르세이 노인은 물얻으러 들어간 집에서
병들고 굶어서 다 죽어가는 3대 다섯식구를 발견한다.
그집서 사흘이나 머무는 동안 에르세이는
처음 빵을 나눠준 데에서 나중엔 그들이 빛지고 잃은 땅까지 찾아주며 성지순례 자금을 다쓰고 중도 귀환해버린다.

예핌노인은  기다리다 결국 홀로 성지순례여행을 마친다.
가는 동안 손안에 돈주머니를 잃을까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성지순례 여행객 중에 예르세이를 본 줄로 알고 만나려다 놓친 일도 겪었다.
어찌되었건 성지순레라 해서 각종 의미깊은 장소를 다 가보고 요단강 물을 퍼오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 다시 집걱정에 휩싸인 예핌 노인.
가다가 예르세이 노인과 헤어졌던 마을에서 예르세이의 놀라운 행적에 대해 듣게 된다.
이 마을 망해가는 한 가정에 들러 온 정성 다해 보살펴주고  재기할 발판까지 마련해준 후 한밤중에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진 순례자를 기리며 이후로 이 가정은 다른 순례객들을 극진히 섬기는 가정이 되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아버지 없는 그새 살림을 낭비하고 방탕하게 지내고 있었다.
반면에 예르세이 노인의 식구들은 예르세이가 성지순례를 실패했건 말건
그의 이른 귀향을 오히려  반기며 안도했었다고 한다.
이렇듯 귀향 후 모습도 양쪽집이 극명하게 나뉜다.

마침내 예핌 노인은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독자들도 교훈을 받겠지.
이 작품이 놀라운 건 그 교훈이 결코 한가지 주제로만 수렴되지 않을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얼핏보면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을 통해 인심을 잘써야한다는 권선징악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신앙심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 톨스토이도 믿음에 의거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말하고 있으니까

나는 예핌이나 예르세이나 다 이해가 갔다.
둘 다 어찌되었건 믿음만큼은 똑같이 신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간과 정성을 다해
성지순례를 결행하지 않았을 테니.

예핌과 달리 내게 신앙이 없기전에 딱 예핌같았다.
뭐든 내가 직접 해야 속이 시원했고
나만의 관점과 틀이 분명해서 다른 관점을 갖기 힘들었다.
의심도 많았다.
무엇보다 사랑을 믿지 못했다.
사랑 Love 말이다!

그러다 하나님을 알게되고 그 아들 예수도 만났다.
그뒤로  내 삶은 달라졌다.
그 만인평등 죄인설에 근거하야
내 주위 모든이들의 모습에서 내 들보같은 죄악을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품었다기 보다
묵묵히 이 때는 지나가리란 걸 연습하게 되었다.
사람에게 저마다 악이있어서
그걸 많이 쏟는 사람, 자주 쏟는 사람,
삭히는 사람, 끝도 없이 나오는 사람, 아주 가끔 나오는 사람 뭐 그런 차이를 보게 되었다.

나는 많이 그리고 자주 쏟는사람이었다.
그걸 선배 교인들이 말없이받아주었다.
내 안의 악을 얼추 쏟아가니 어느새
나는 예르세이같은 사람이되어 있었다.

처음엔 나도 몰랐다.
난 여전히 교회안에서 여전한 내 못남과 선배교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조바심과 컴플렉스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 안의 악을 쏟고 난뒤 편안히 들어와 앉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내 온몸 구석구석에서 발산되었나보다.

나도 모르게 나는 무진장 온유하고 무진장 긍정적이고 무진장 인심좋고 무진장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헐!

그러니 예르세이 노인이 원래 성격이 그런 사람이라고 보지 않으련다.
예르세이 노인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예수의 향기가 차올랐던 것이다.
그걸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누군들 온유하고 인정많고 관대하고 여유롭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타고난 성정도 있고
가슴속 상처와 악도 있는거고
그래서 내 맘대로 안되는 게
바른 삶이고 도덕군자의 삶이다.
꼭 거기까지 안가더라도
가족들이 편안히 여기고
안보이면 보고싶다고 찿아대는
그런 사람같은 사람이
누군들 되고 싶지 않겠느냐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그때의 성령충만했던 삶이 그립다.
지금은 하나님 말 안듣고
내 맘에 미움과 욕심과 불순종이 가득하다!
(윤석열 정권과 모든 부역세력 미워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들을 두고 날마다 기도하고 있단 말이다
오 주여 저악마들 당장 끝장내주소서)

오늘 예르세이노인은 밀린 기도 하라고 나를 이끌어준다.
쫌 있으면 기도회 시간인데
난  집에서라도 기도문을 읽어야 겠다.

톨스토이는 참.. 대단하다!
천국에서 만나면
감사합니다 꼭 인사올려야지♥

● 이 세상에는 죄짓는 일 말고는 속상한 일이 하나도 없어
영혼보다 더 소중한 건 없으니까(p122)

● 영혼의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더 편치 않을걸.(p122)

촛불


악덕 마름의  학정아래 신음하고 있는 농노들
지주를 찾아가 하소연해도 들어주질 않고
마름은 지주에게고자질했다고 더울 악독하게군다.

이에 농노들이 마름을제거할 작당을 꾸민다.
그러나 막상 살인을벌이기는 쉽지 않고
이때등장한 신실한농노 하나.
신실한 신앙심에의거하여 악을 악으로갚지 말자고 설득한대.
농노들은 그를 비웃고 마름은 러시아정교의 축제일에서까지 농노들을 부려먹는다.

마름은 결국 다른 하인을 시켜 농노들의 속엣말을 들어오라고 시킨다.하인은 하는 수없이 농노들이마름 저주하는말을 고대로 전한다.
그리고 농노들의 살인모의를 막던  페트로시카 미헤예프라는 농노는 뒷담화도 없이 쟁기에 촛불을 놓고 일하는데 쟁기질 하는 중에도 그 촛불은 꺼지지가 않더라는 신기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악덕 마름 미하일 세뇨니치는 농노가 저주한 말 고대로의사고를 당하며 죽는다.

주여
오느날 악덕 마름 윤석열을 미하일 세뇨니치같이 처단해주소서.
국민이 투표를 통해 나라살림 잘하고 국민들 생명과 삶을 잘 돌보라고  곳갓과 권력을 맡겼는데 매일밤 술만 마시고 나라 살림 우르라이나랑 미국이랑 일본에 다 갔다바치고 있습니다.
노인, 방과후, 청년, 미혼모 , 교육 온갖 복지예산은 싹다 삭감되었습니다.
바른 말했다고 툭하면 여론재판에 압수수색입니다.
자기 마누라랑 장모 비리 수십건 입건된 건 다무혐의 처리하거나 불기소 처붐입니다.
모조리자기 입맛에 맛는대로사람 부리며
나라살림 국민안전개판으로만들었습니다.
오늘 뉴스에는 나로호 발사예산이 싹 삭감되고
나로호 개발아던 한국 우주개발 고급인력들 수백명이 사라지고 고작 여섯명이 남아 대한민국첨단우주시대를 준비하라고 해놨답니다

그러니 저도 제가 제 악으로  윤석열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촛불을 들고 여호와께 호소하오니
국민의 마름으로 왔다가
국민 다 죽이는 악덕마름 윤석열을 처단해주소서
대한민국의 주인은 윤석열이 아니라 이나라 국민이라고헌법에써있으니까요

바보 이반


그 유명한 「바보이반」을 여기 「톨스토이 단편선」서 만났다.
(근데 왜 유명하더라? )
자신의 악한 수가 통하지않는 선량한 사람을 작정하고 곤란에 빠트리는 이야기는 대표적으로 구약의 욥이 떠올랐다.

세 도깨비와 세  형제 이야기는 또 아기돼지 삼형제 등 이솝우화나 그림형제동화로도 익숙한 컨셉이지.
맞다 우리의 전래동화도 있구나
세 형제의 에피소드 직렬 진행으로  마지막에 결론을 배치하는!

아까 '촛불' 도 그러더니만 톨스토이 이 냥반 왜케도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을 선동하는 메세지만 자꾸 읽히는 지 원 ㅋ

"임금님 나라에는 모든 사람에게 손으로 일을 하도록 하는 어리석은 법률이 있는가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들이 어리석기 때몬에 나온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리한 사람은 무엇으로 일하는지 아십니까?"

"바보인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는가?"

"(여러분이 손으로 일하는 건) 바보라서 그런 겁니다.
제가 어떻게 머리로 일하는지 그 요령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손보다 머리로 일하는 편이 이롭다는 걸 알게 될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보라고?"

"머리로 일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머리로 일하는게 백갑절 어렵습니다.
때로는 머리가 빠개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럼 가르쳐주게.
손이 지쳤을 때 머리로 대신 일하는 방법을."

그리고 대장도깨비는 머리가 빠개져 죽었대더라.
그라니까니 오늘날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조선중앙동아일보 친일족벌언론 세력들 배후에는 이런 악독한 도깨비가 사주하고 있었구나
아니 아니 윤석열은 아예 대장도깨비가 둔갑했구나!
손발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거라면 육채노동을 비하한 이나라 대통령의 실체가
선량한 사람을 부하도깨비들 시켜 망해먹게 조장한 그 '빌어먹을 애비 도깨비'로구나.

● 그러나 이 나라에는 단 한가지의 중요한 관습이 있다.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자는 식탁에 앉게 되지만 굳은 살이 박히지 않는 자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p246)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고 싶지 않으면
교도소에 가면 된다.
그럼 각자 배식판에 자기 밥 제대로 나온다.
윤석열 도깨비를 교도소로 보내자


어떻게 작은 악마는  빵 조각을 보상하였는가


여기도 「바보 이반」처럼 마음씨 고운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악마일당 이야기.
앞선 '큰도깨비'는 바보이반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배했지만 여기 '작은 악마' 는
첫 실패를 금새 크게 만회하고 큰 악마의 칭찬을 받기까지 했다.
작은 악마가 맘씨좋은농부를 타락시킨 건
풍요와 이를 통한 욕심이었다.
술이야 그까이꺼 출구를 못찾고 인간내면 안에서 잘 잠자고 있던  것을 분출시키는 촉매제 그 이상도 아니었구

달걀만한 씨앗


임금 손에 들어온  놀라운 달걀만한 크기의  씨앗 하나.
이를 알아보기 위해 아흔살 파파 꼬부랑 노인을 불렀더니 자기 아버지가 잘 아실거라고 아버지를 부르자고 한다.
그래서 등장한 아흔 살 노인의 아버지는
아들보다는 말귀도 잘 알아듣고 걸음도 제법 또렷하다.
이 할아버지는 또 자기 아버지를 부르자고 청한다?
왠걸 처음 꼬부랑 할아버지 농부의 할아버지 되는 이 노인은 오히려 더욱 정정하여 지팡이 하나 짚지 않고 잘도 걷는다.

왕은 그리하여 이 청년같은 막강 고령 노인에게 비법을 묻는다.

" 다름이 아니오라 세상 사람들이 제 품으로 살아가기를 그치고 남의 것을 넘보게 되었기 때문이옵니다. 옛날사람들은 신의 뜻을 좋아 살았사옵니다 . 제 것을 가질 뿐,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던 것이옵니다."(p267)


「바보 이반」,
「어떻게 작은 악마는  빵 조각을 보상하였는가」그리고
「달걀만한 씨앗」.

여기까지 읽으니 이 주제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책이 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때 적어 놓은 소감 그대로가 오늘의 내  소감이로다
그래서 그대로 퍼왔다 .

루소는 자연상태의 미개인 혹은 원시인의 상태를 대단히 긍정하고 있다.
그가 근거로 드는 예들을 보면 반박불가로 옳은 말씀들이다 .
원시상태에서 혹 자연상태에서 옷도 없이 도구도 없이 동물들과 생존경쟁을 벌이고 천혜의 날씨와도 싸웠을테니 몸뚱아리 자체가 전부였을 그들의 피부, 근육, 몸놀림, 지구력, 생존력등은 오늘날 도구적 인간 호모 파베르는 얼마나 퇴화해보이겠는가

또 미개상태의 인간은 의술의도움없이도 자연치유력으로 살아왔고 또 애초에 의술이 필요없이 욕심없이 먹고 사심없이 먹이를 구해왔으니 현대의 복잡한 불치병이 무엇이고 변비와 우울증등이 따로 없었겠지.
백번 문명화한 인류가 더 허약한 것 맞다.

때문에 !
문명은 게으르고 더 싫증 잘 내고 욕심 많은 인간의 성정덕에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일하다보면
루소가 찬양하는 원시미개인 처럼 주어진 일에 꼼수없이 묵묵히 자기일을 감당하는 사람이있는반면에
금새 꾀가 나고 지루해하는 사람이 있다.
시간을 단축하고 사람 손을 덜은 이 기계들의 발명은 바로 이들 덕분이었다.

단순하고 원시적인 미개사회에서는
나서기 좋아하고
귀찮다고 촐삭거리는 성품은
그 작은 사회 원로들에 의해 금새 진압되었을테고
애초 자라면서 그런 성품은 싹수 시절부터 관리받았을것이다.

특히 이기심. 탐욕.
이것이 또 문명발달의 원천이었을것은 더욱 자명한 터.
더 많이, 더 더욱 내가, 내가하는 이 욕심이 아니었으면
굳이 남보다 더 부지런할 이유가 무엇이고
굳이 소유를 늘이기위해 애쓸 이유 무엇인가

바로 이 싫증에서 오는는 권태감, 이기심들이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저지른 최초의 범죄의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 번영도
그로인해 루소가 탄식했던 문명인의 고뇌도
다 아담과 하와 때문이다.
죄때문이다.

권태감, 이기심, 욕심
정말 살다보면 나 스스로에게도 피곤한 정념들이다.
어찌 보면 루소는 비록 불신자였지만
인간성의 타락에 참 많이 슬펐었나보다.

원시미개인의 삶을 보면
우리 동양의 입장에서 보면 초막의 노인이 안빈낙도하고 사는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당대문명인의 모습이 많이개탄스러웠나보다.

 

●부자는 지배하는 쾌락을 알게 되자, 곧 다른 모든 쾌락으로 경멸했다.
그리고 새로운 노예를 쓰로 이라하여 이웃사람들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고기 맛을 알면 다른 모든 먹이를 버리고 그 뒤로는 사람만 잡아먹는 굶주린 이리와 같은 것이다.(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p 105.동서문화사 2016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의식, 또 한 편으로는 이해관계의 대립과 항상 타인의 희생으로 하여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는 숨은 욕망, 이런 모든 악이 사유의 첫 효과이며 생긴지 얼마 안되는 불평등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결과인 것이다.
(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p105. 동서문화사 2016)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하인은 괭이를 집어들고 바흠의무덤으루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정확하게 3아르신을 팠다.
그것이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전부였다.(p303)

대자(代子)

러시아정교회( 로마 카톨릭과의 교리 등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겄다)
의 죄의 본질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톨스토이는 작가이기 이전에 신실한 정교회 신도로서 자신의 작가적 역량과 재능을 통해 구도의 길을 갔던가 보다.

죄의 문제를 크라임crime 적으로 해석하는 러시아정교?
죄는 sin 그러니까 행위를결국 표출시킨 내면이  문제 아닐까?

어찌되었건 톨스토이는 악에 대해서만큼은
예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야말로 악은 악 때문에 불어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악한 일을 책망하면 책망할수록  더욱더 악은 퍼져나간다.
다시 말해서 악은 악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p324)


악으로 악을 갚을 수 없다는 건 너무도 자명한 진리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장 17절)
그런데도 나는 순간을 못참고 당장의 분을 해소하는데 급급하다.
그 미련함이 진짜로 곰 같으다.
러시아나 한국이나 곰에 대한 메타포가 똑같은걸까? ㅋ

그걸 깨달아 알아가는데 당장에 주인공 대자도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나는 하나님을 만난 지 20년도 안된다.
아직 멀었다.
구원은 받았는데 인간은 아직 안됐다 ㅠ
남은 10년갖고 될까?

톨스토이의 숭고한 신앙과 그 성심이 부럽다.
그걸 구현해낸 창의력도!

대자가 겪어낸 네 가지 에피소드의 기발함.
이런 신앙적 메세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심오하고 기발한 로드무비 에피소드로 여겨지겠지만
그만큼 진리를 탐구한 열정에서 나온 소산물일거다!
창작의 바탕은 진실이라는 걸 늘 느낀다.

예멜리안과 빈 북


읽는 내내 터질듯한 궁금증들

1. 갑자기 나타나 예멜리안에게 결혼하자고 청한 여인은 누구?

2. 아내를 탐하는 왕의 책략으로부터 예멜리안은 언제쯤 벗어나려나

3. 노파는 왜  눈물을 그치지 않는가

4. 노파와 예멜리안 아내는 무슨 사이인가?

5. 그리고 빈북을 두드리자 나타난 충성스런 군대가 빈북이 강에 잠기자 같이 사라졌거늘
그걸 보고 왕이 맘을돌이켰다니?
신령한 빈북도 군대도 다 사라졌는데?

앞선  단편들에서도느낀 거지만
톨스토이의 이 우화들은 이렇듯 앞뒤맥락을 가늠할 수 없다 .
어찌되었건 결론은 예멜리안과 아내는 더이상 왕의 괴롭힘없이 오래오래 행복하였대더라

세 아들

아들이다. 것두 세 아들 이야기.
보통은 셋에게 재산을 동시에 나눠주고 각자가 독자적으로 재산을 사용한 후에 돌아와 결과보고가 이어지던데 여긴 어째 다르다!

우선 첫아들에게 1/3 재산을 나눠주고
아버지처럼 살라 그러면 행복해진다
그 두 마디만 일러주고 끝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기억하는 유쾌함만 떠올려 쾌락을 좇아 흥청망청하다 재산을 탕진한다.

이 모든 결과가 드러난 후에 둘째아들에 1/3 이 돌아갔다.
둘째는 첫째의 교훈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눠받은 재산을 늘리려 애를 쓰는데 쉽지 않다.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데도 묵묵부답이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하다 재산도 날리고 결국 자살을 해버렸다더라.
헐!!!
뭔 이런 전개가 다있노
단순한 우화려니 하는데
어째 전개가 스펙타클 사이키델릭하다 ㄷㄷ

이후 셋째가 마지막 1/3 을 물려받다.
셋째는 위 형들의 교훈을 되새겨 아버지의 온 삶을 묵상하고 또 묵상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자식들을 위해 베풀며 오늘의 재산을 일구었음음!
자식뿐 아니라주위사람들에게도 베푸는 삶을 살아왔음을.

이 깨달음을 갖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니 이제서야 아버지도 아들을 받아들이며  니가 얻은 깨달음을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널리 전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작가가 바로 이어서 등장한다.
이 아버지와 세 아들 비유의 뜻을 풀어준다
그러니까 「세아들」은 오늘날 성도의 도리를 가르치는 톨스토이의 설교였던 것 ㅎ

그렇다면 톨스토이님!
난 둘째아들 비유가 자아실현에 매달리는 모습을 상징했다는 게 이해가 안됩니다요 ㅎ

어찌되었건 진정한 자아실현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내 영혼과 내 삶에서 구현해낼 때 진정 완성되는 것!
네 아멘입니다♥

|작품해설| 톨스토이 민화의 시학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의 엉성한 플롯과 개연성의 이유를 알았다.

톨스토이가 고향 야스나야 폴라냐에 머물때 이야기꾼  V.N.시채골레노크를 만난다.
(오늘날 러시아 툴라에는 톨스토이의 저택이 있다)
톨스토이는 그로부터 들은 전설과 민화들에 살짝만  다듬어서  여러 매체에 발표해왔다.

그래서 해설자는 확보된 자료에 근거해서 여기 단편선에 수록된 열 세작품의 출처와 변용 여부를 설명해놓았다.
맨 마지막 「세 아들」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왜지?

암튼 톨스토이는 러시아 민간에 파진 각종 설화들을 그 엉성함 그대로 좋아했고 널리 전하고 싶어했다는거다.
그랬구나
그러니 천하의 톨스토이의 단편이 그리도 조야한 플롯이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이제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