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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AMERICAN PROMETHEUS 로버트오펜하이머 평전. 카이버드 마틴 셔먼|최형섭 옮김. ftr 영화 오펜하이머

혜성처럼 2023. 5. 27. 12:24

 


2010년 국내 간행본


이건 2005년 미국 간행.
발간 다음해 퓰리쳐상 수상!

2008년 더프 쿠퍼 상 ,
시카고 트리뷴 '올해의 최고 책',
디스커버 매거진 '올해의 최고 과학 책'을 수상


그리하야 명성과 퀄리티만큼이나 가공할 책의 두께 -.,-;;;;;;;;
일단은 GoGo!


 

 
한국어판 서문


핵무기 개발의아버지이었다가 이후 핵개발 중단 및 군축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극적인 변모를 이룬  로버트오펜하이머.
그만큼 핵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느낀 지식인의 실천이고 웅변이었다는 짧은 소개가 담겨있다.
그리고 이는 당장 머리위로 핵을 개발한 북한 을 상대하고 있는 남한 대한민국에 의미가 클 것이라는 저자의 고언이다.

●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핵 대결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있다.
오펜하이머는 핵확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그는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관리체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늦게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민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p 10)


서문

 

반항적인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을 때, 그가 그것의 끔찍함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을 때 ,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분노에 차서 그에게 벌을 내렸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청문회 위원회에서 반대의견을 피력했던 워드 에번스가 썻듯이, 오펜하이머에게서 비밀취급 인가를 빼앗은 것은 " 이 나라의 오명" 이 아닐 수 없다.(p18)

 
 

프롤로그

"제길 ,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단 말이야."



1967년 오펜하이머의 장례식장.
그의 장례식장을 찾은 정계 학계 예술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열거된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유족 곧 살아생전 그의 사랑하는 가족.
캐서린 키티 퓨닝 오펜하이머,자식 토니와 피터
그리고 역시나 물리학자이자 형과 함께 매카시 광풍에 희생당한 프랭크 프리드먼 오펜하이머.

이제 저자들은 다양한 평가와 다면적인 모습이 공존하는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25년에 걸쳐 여러 아카이브들과 개인 소장 문서들로부터 수집한 수천건의 기록에 바탕하고 있다'(p16)

 
1장
그는 모든 새로운 생각을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매끈한, 불쾌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1904년 출생 오펜하이머의 조상과 하버드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오펜하이머를 만난다

오펜하이머의 아버지는 독일계 유태인 이민 1세대이며 어머니는 역시 독일계 유태인 이민 2세였다.
부부가 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성공한 사람들이라 오펜하이머는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마음껏 취미생활을 하며 자랐다.

오펜하이머는 개혁유태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를 들어간다.
이곳은 당시 미 주류사회에 퍼져가던 반유대주의로부터 유태인을 보호할 뿐 아니라 유태인 사회가 미국사회에 보다 주도적이고 헌신적으로 역할을 해나갈 것을 교육적으로 앙양시키는 그런 곳이었다,
때문에 설립자와 교장부터 자유분방하고 개척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고 동참한 교사들또한 헌신적이며 학생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오펜하이머는 입학전엔 가정에서 입학후엔 교사들과 친구들에 의해 두드러진 천재였지만 바로 이런 학교 분위기와 교육풍토에 의해 큰 덕을 봤다.
아무도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을 두고 성가셔하지 않고 오히려 오펜하이머가 자유롭게 학문활동 하는 것을 격려하고 여건을 조성해줬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요트나 승마등 도전적이고 무모한 육체활동을 즐겼다고 한다.
그를 사랑하는 지인들은 모두 오펜하이머의 극단적인 위험취미를 경험하며 혀를 내둘렀다.

오펜하이머는 그러니까 천재이고 집요한 도전정신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겪으며 그들과 교우하는 능력을 키운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만난 곳이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다.
오펜하이머는 이곳을 평생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궁극의 업적이 되는 원자폭탄 연구장소가 여기 로스 앨러모스였다.
이곳에서 그는 전국에서 난다긴다 하는 과학자들을 조율하며 국가가 원하는 세계최초의 일을 성공시켰다.


 

2장
자신만의 감옥

내가 명확한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는 개념은 전혀 사실과 맞지않는 것이다




하버드로 간 천재.
내성적이고 자기만의 성향과 주관이 확고한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친구를 많이 사귀지는 않았지만 깊고오래 사귀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하버드 시절에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는 20세기 현대물리학계의 거목들 명단을 보는 거와 다를 바없다.

 


책이 다루는 미립자와 우주 거대물질의 세계
이를 밝혀내는 여정에 등장하는 수많은  물리학자들
이를 통해 20세기 전후의 물리학의 발전은 이전 과학사에서처럼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등 거목 한 그루 듬성듬성한 느낌이 아니라 한그루 한그루 탁월한 나무들이 촘촘히 엮이고 엮여 이룬 위업들의 증거를 보았도.
어찌되었건 덕분에 내겐 전혀 접촉점도 상관도 없을 물리학계의 위대한 위인들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이 책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읽는 과정에서 만났던 그 이름들을 다시 만난다.
오펜하이머는 그들과 밀접할 뿐 아니라 본인도 이 휘몰아치는 물리학 발전의 역사 한가운데  좌정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

호건
퍼거슨



번하임 생화학자 Frederick Bernheim (1905-1992)

듀크 대학교 의과대학 의 창립 멤버



제프리스 와이먼
Jeffries Wyman (1901년 6월 21일 - 1995년 11월 4일)
단백질 , 아미노산 및 헤모글로빈 의 물리적 화학 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분자 생물학자이자 생물 물리학자.



보이드 William Clouser Boyd
(1903년 3월 4일 – 1983년 2월 19일)
미국의 면역화학자
. 1930년대에 아내 라일과 함께 혈액형 분포 에 대한 전 세계적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




존 에드살 John Tileston Edsall

John Tileston Edsall (1902년 11월 3일 – 2002년 6월 12일)
생화학자(미)
소수성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한 단백질 과학자.


윌리엄즈 브리즈먼

(사진 못구함)
 


엘프레드 노스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OM FRS FBA (1861년 2월 15일 – 1947년 12월 30일)  
수학자 이자 철학자(영국)



제1대 러더퍼드오브넬슨 남작
어니스트 러더퍼드
(영어: Ernest Rutherford, 1st Baron Rutherford of Nelson, OM, FRS, 1871년 8월 30일 ~ 1937년 10월 19일)

핵물리학자(영국) .핵물리학의 아버지  방사능 법칙을 입안,
방사능이 원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라는 사실을 밝혔으며, 자연 붕괴 현상을 연구해 기존 물질관에 대변화를 일으켰다.
알파 입자 산란 실험


JJ톰슨. 물리학자 (영국)
Sir Joseph John Thomson, OM, FRS, 1856년 12월 18일~1940년 8월 30일)
전자와 동위원소를 발견.
질량 분석기를 발명
190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물론 이 책에 언급안된 이들도 많다
앞으로 오펜하이머의 인생에서 계속 등장할 것이다 .

 
3장
사실은 별로 재미가 없다


나는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
감정이 폭발할 지도 모른다는생각에  만나러 가기가 두렵다

 

1925년
오펜하이머 스물 한살이다.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당시 물리학의 첨단 기지 영국으로 떠난 유학.
그는 러더퍼드에게 보낸 지원서는 퇴짜를 맞았지만 역시나 만만찮게 물리학계에서 탑을 다투는 JJ톰슨을 만난다

그러나 오펜하미어는 여기서 크게 좌절한다.
그럴만도 할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 한살이라고 하지않나.
지금껏 늘 인정받고 자부심 넘치는 그가 새로운 곳에 도착해서 또 얼마나 날아갈까 기대로 부풀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실험물리학이란 지독하게도 재미가 없는 일이었다.
꼼꼼함과 집요함과 무엇보다 단순한 인내심이 필요한 일.
무슨 박피 닦아내는 일이랬던가?
앞서 나온「보이지 않는 세계」의 업적들중 많은 것이 이 실험물리학에서 나온 것들도 있으리라 .
예를들어 진공관에 방사선을 쏘아 입자를 찾아내는 실험.
암튼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학부때도 그렇더니만 실험실에서 엄청 미숙하고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느낌.

그는 한편 자신의 내면안의 죄성, 악마성을 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자신의 실험교수에게 독사과를 주기까지 하며 실험실의 괴로움을 쏟아놓았던 오펜하이머.
대단히 예민한 정서적 감수성을 가진 그였기에 이런 스스로의 모습을 긍정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것이다.

여기에 1926년의코르시카 여행이 해법이 된다
제프리스 와이먼, 프레더릭 번하임, 존 에드살
이 함께했다.
그 여행에서 읽었던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신 시간을 찾아서」.
거기서 그는 치유를 얻었나보다.


"그녀가 다른 사람처럼 자신이 다른사람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101.「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인용)


코르시카에서 오펜하이머는 이 글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으면서 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 그것은 고통스런 통찰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에 대해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죄의식에 가득찬 어두운 생각들이 활자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심리적 부담을 덜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 생각이 인간조건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서는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이상 스스로를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없이 독서를 통해서 우울증이라는 블랙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는 것에서도 자기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p101)

그는 이제 다시 새로운 갈림길에 선다.
자신없는 실험물리학을 떠나 이론물리학의 세계로 들어갈것을 결심한다.

이때 그가 만나는 인물들



제임스 채드윅 경
(영어: Sir James Chadwick, CH, FRS, 1891년 10월 20일 ~ 1974년 7월 24일)

물리학자(영국)
중성자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41년 마우드 보고서(MAUD, Military Application of Uranium Detonation, 우라늄 폭발의 군사적 이용)를 작성,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맨해튼 계획의 영국 팀 수장이었다.
1945년 물리학 연구 공로로 기사 작위 수여



로버트 앤드루스 밀리컨(Robert Andrews Millikan, 1868년 3월 22일 ~ 1953년 12월 19일)
미국의 실험 물리학자

"또 울어대는군
과연 알을 낳기는 할까"(p102)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독일어: Werner Karl Heisenberg
1901년 12월 5일 ~ 1976년 2월 1일)

독일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양자역학의 주요 선구자.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쓴 후속 논문에서는 양자역학의 행렬역학의 정교화
. 그는 1927년에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하다.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에르빈 루돌프 요제프 알렉산더 슈뢰딩거
(독일어: Erwin Rudolf Josef Alexander Schrödinger
1887년 8월 12일 - 1961년 1월 4일)
노벨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아일랜드 물리학자.
슈뢰딩거 방정식 :시스템의 파동 함수를 계산하고 시간에 따라 어떻게 동적으로 변하는지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공



페테르 카피차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1894년 7월 8일- 1984년 4월 8일)  받은 루마니아계 소련 물리 학자
1978년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




폴 디렉 Paul Dirac
( 1902년 8월 8일 – 1984년 10월 20일) 영국의 이론물리학자로 양자역학 및 양자전기역학 의 창시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의 루카스 수학과 교수 ,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와 마이애미 대학교 의 물리학 교수 역임
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닐스 보어
Niels Henrik David Bohr
닐스 헨릭 데이비드 보어
( 1885년 10월 7일 – 1962년 11월 18일) 덴마크의 물리학자,철학자
원자 구조 와 양자 이론의 근본적인 이해의 틀 마련, 19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막스 보른 Max Born
(독일, 1882년 12월 11일~1970년 1월 5일)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양자역학, 특히 파동 함수의 통계적 해석에 대한 기초 연구"로 195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4장
이곳의 일은정말 고맙게도 어럽지만 재미있다

 

너도 괴팅겐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이곳의과학수준은케임브리지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전반적으로 평가해보면 전 세케에서 이보다 더 나은 곳을 찾기어려울거야.
이곳의 일은, 정말 고맙게도 어렵지만 재미있다.

 

오펜하이머 평전은 총 40개 장이다.
각 장마다 달린 제목이 아주 극적이다.
제목만 갖고도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
4장은 그래서 오펜하이머의 독일 괴팅겐에서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생활을 짐작케 한다.

총 9개월을 머물렀다고 한다.
그동안에 오펜하이머는 박사논문을 17개나 발표했다.
영국에서 떠나기 전에도 논문 두 편을 발표했는데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유의미한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이에 케임브리지가 논문집에 게재를 했다.
오펜하이머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선배 이론 물리학자들은 그의 논문을 이미 다 읽고 있던 상태라고 한다.

아무튼 오펜하이머의 괴팅겐 생활은 내게 두 가지 단상을 남겼다.

첫째 , 물만난 물고기같은 천재들속의 천재 오펜하이머.

이 장은 오펜하이머 이야기로는 극적이고 짜릿하긴 한데 오펜하이머가 이룬 성과들인 그 복잡한 양자역학 이야기가 줄구장창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머리가 아프다.
어찌되었건 오펜하이머는 초반 넘나 팍팍 돌아가는 머리와 터지는 열정 때문에 강의 중에 교수님 말을 자르고 다른 수강생들 눈쌀 찌푸리는 짓을 많이 저질렀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오펜하이머 버릇을 고치던지 수강생 전체가 수업을 안듣겠다고  다른 학생들이 연명서를 돌렸겠나.
앞서 영국 케임브리지에서의 모습은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떠올렸다면 여기 괴팅겐에서의 오펜하미어는  영화 「아마데우스」속 모차르트같다.
물론 괴팅겐은 살리에리보다는 모차르트 홍수사태같은 곳이다.

오펜하이머가 괴팅겐에 머문 1926년 27년동안 양자역학의 비약적이고 급속한 발전이 이뤄진다.
그래서 양자역학을 ' 소년의 물리학' 이라고까지 불릴 지경이었다.
하이젠베르크와 디랙 24세, 볼프강 파울리 26세, 요르단 그리고 오펜하이머 23세.

정말 공부밖에 모르는 천재들.
속속 발표되는 논문들은 또 순식간에 회람되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이디어는 터지며 이것이 다시 새로운 연구와 논문의 소스가 되고.

갑자기 어느 대학 총장이 남편이 일하는 관련없는 학회에다 논문을 발표하게 하고는 그걸로 교수 연구실적으로 둔갑하는 기술.
이게 대학교수의 연구실적 짬짜미로 언론을 통해 발각되었는데도 뻔뻔하게 관행 어쩌고 하는 입장.

그리고 뉴스타파는 또 어느 '약탈적 학술단체' 의 실체를 위장기고와 투입을 통해 밝혀내기도.
돈만 내면 이 학회에 자기 논문 실어주고 그 교수는 그걸로 자기 연구논문 활동 증거자료로 삼는 ..
안그런 교수님도 물론 있지만
이런 불법이 버젓이 횡행하는 대한민국 학계 참 갑갑하다

오펜하이머와 괴팅겐
곧 양자물리학의 급진전의 역사

●  이 당시의 위대한 업적으로는 막스플랑크의 양자발견,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업적인 특수 상대성 이론, 보어의 수소 원자의거동에대한 이론적 배명,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 그리고 슈뢰딩거의 파동역학 이론 등이 있었다 .
이와 같은 혁신적인 시기는 확률과 인과성에 대한 보른의 1926년 논문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리학의 혁명적 변화는 1927년에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고 보어가 상보성 이론을 정립하면서 완성되었다.
오펜하이머가 괴팅겐을 떠날 무렵이면, 뉴탄을 넘어서는 새로운 물리학의토대가 놓이게 된다.(p 110)

막스 보른. 괴팅겐 게오로기아아우구스타 대학교 물리학 학과장이다.
이미 하이젠베르크, 유진 위그너, 볼프강 파울리, 엔리코 페르미등 쟁쟁한 학자들을 제자로 두었고
' 양자 역학' 이란 말도 처음 만든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오펜하이머의 스승이 되고 동료가 되고 또 친구가 되다.

오펜하이머의 물리학과 동기들

제임스 프랑크 (James Frank 1982~1964)
1925 노벨물리학상 수상 , 실험물리학자.

오토 한 (Otto Hahn , 1879~1968)
나중에 핵분열 현상 발견

에른스트 파스쿠알 요르단
(Ernst Pascual Jordan , 1902~1980)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이론을 행렬역학으로 나타내는 공동연구 진행중

디랙
양자장 이론 연구 , 노벨상 수상

요한 폰 노이만(Johann von Neumann, 1903~1957)
맨하탄 프로젝트참가

조지 유진 윌렌베크 (Gorge Eugene Uhlenbec, 1902~1978)


양자물리학의 주요논문

「진동-회전 밴드의 양자이론에 대해」
: 분자 에너지 준위에 대한 것
「이체 문제에 대한 양자 이론에 대해」
: 수소원자에서 연속 상태로의 전환에 대한 연구

이후 괴팅겐에서 오펜하이머의 연구주제
- 양자 이론을 이용해 분자 밴드 스펙트럼의 주파수와 세기 측정 가능성을 보여주다.
.
하이젠베르크와의 만남 후
- 왜 분자가 분자인가
-  「분자의 양자 이론에 대해」(막스 보른 공동저자)
=> " 보른 오펜하이머 근사"
- 분자 안의 가벼운 전자가 무거운 원자핵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 주장.
핵 진동의 유효 파동역학적 현상 계산 가능하게 함

졸업논문
'수소원자의 엑스선에서의 광전 효과의 복잡한 계산' 연구
-
오펜하이머가 발표한 논문들의 양자역학 역사적 의미들을 내가 알 수 없지만 대단한 성과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깝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금 책읽는 방식으로 읽었더라면 .....

그나저나

그는기차를 타고 니더작센을 거쳐 괴팅겐으로 갔다.
괴팅겐에는 오래된 시청과 14새기에 지어진 몇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와같은 고풍스런 건물들은 자그마한 중세 마을 분위기를 자아냈다.
'맨발의 거리(Bafusser Steasse)' 와 ' 유태인거리(Juden Strasse) ' 가 만나는 교차로 한 귀퉁이에는400년 이상된 융커스 홀이라는 식당이 있었고, 그 곳에서는 3층 높이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둘러싸인 비스마르크의 부조 아래서 송아지  커틀릿을 즐길 수 있었다. 예스러운 집들이 마을의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라인 운하 기슭에 위치한 괴팅겐의자랑거리는 1730년대에 독일 왕자가 설립한 게오르기아 아우구스타 대학교였다. 이 대학의 졸업생들은 오래된 시청앞 분수대로 걸어 들어가 거위 소녀 동상애 키스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p111)

괴팅겐에 가고싶다.

 

5장
내가 오펜하이머입니다


나도 그리 단순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오펜하이머에 비하면 아주 단순한 편입니다 (이지도어 라비)

 

오펜하이머의 '두번째 전성기'(p147) 시절 이야기.

괴팅겐에서의 활약은 놀라웠고 지도교수 보른도 그가 떠나는 걸 애석해했지만 향수병에 시달리는 오펜하이머는 결국 귀국을 결정했다.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하버드에서 박사후 과정연구를 좀 더 하고  그리도 좋아했던 뉴멕시코를 다시 찾는다.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와 패서디나 두 곳에서 교수직을 수락한다.
패서디나는 그만큼 뉴멕시코 사막의 분위기를 가까이 느낄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로스피노스의 땅을 사들여(임대후 최종 매입) 페로 칼리엔테로 부르며 평생을 이곳을 사랑했다.

다시 유럽으로 가는 오펜하이머
여기서 파울리와 이지도어 라비와의 교분.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독일어: Wolfgang Ernst Pauli, 1900년 4월 25일 ~ 1958년 12월 15일)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양자 물리학자
. 194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영어: Isidor Isaac Rabi, 1898년 7월 29일-1988년 1월 11일)
유럽 갈리시아(오늘날 폴란드 지역)태생 물리학자.
1944년 핵자기 공명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5장은 특히나 오펜하이머의 양자역학 업적의 의미를 강조한다.
미국으로의 귀국후 1928년 한해동안 6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연속체 파동 함수의성질이라는 분야에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물리학자였다.(P147)
- 물리학자 로버트 서버는 그의 가장 독창적인 공헌으로 전기장 방출 이론을 들었다.(p147)
-또한 그는 이 당시에 엑슨의 흡수계수의계산과 전자의 탄성 및 비탄성 산란에 관한 여러 업적도 세웠다.(p148)

이 모든 것들은 인류에게 어떤 실용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양자 물리학은 우리를 둘러싼 물질 세계를 설명해준다.
양자역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연구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진실로 판명되었다.
pc, 원자력, 유전공학, 레이저기술.
젊은 오펜하이머는 추상적 아름다움때문에 양자역학을 사랑했지만 그것은 곧 인류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이론이 될 것이다.(p148)



6장
오피

 

나는 앞으로 30년동안 우리가 사게 될 세상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요동치는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세상을 거부할 권리가 중러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미국 양자 역학의 중심부에서 큰 활약 이어가는 오펜하이머
'얼마 지나지 않아 오펜하이머가 이론 물리학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되리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 분야를 전공하고 싶다면 버클리로 가야한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p 157)
 
나는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1930년 오펜하이머가 < 전자와 양성자 이론에 대해 >라는 중요한 논문을 썼다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디랙의 방정식을 참조해 전자와 같은 질량을 가진 "양전자 positron"이라는 새로운 입자를 제안했다. 
디랙은  이에 오펜하이머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 반물질 (antimatter)의 이름을 '반전자(anti- electron)'이라 불렀다.
보어와 파울리 등은 그럴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칼 앤더슨이라는 실험물리학자에 의해 존재를 입증받았다.
그리고 1933년 디랙이 이걸로 노벨상을 탔다.
 
이후에 오펜하이머는  < '직접이론'을 이용한 스펙트럼선의 무한 성질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을 그의 제자 윌리스 유진 램이 실험 물리학으로 밝혀내 노벨상을 탔다. 물론 1955년 한참 뒤이긴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아이디어를 내고 노벨상은 다른 사람들이 받는다?
그러니까 북치는 사람 따로 재주 부리는 사람 따로 뭐 그런 건가?
이유인 즉슨 워낙에 오펜하이머는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고 직관적이며 또한 상상력이 풍부한데 다만 한 가지를 오래 붙드는 인내심이 떨어져서라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신의 기록」속 이집트 성체자 해석을 위해 경주했던 영국 천재 토마스 영이 생각났다.
누구보다 선두에 섰고 문자해석의 획기적인 전기도 찾아냈던 그였지만 그의 관심사가 워낙에 넓고 깊어서 잠시 성체자 해독을 미루둔 틈에 샹폴리에가 치고 나가며 모든 영광이 그에게로 다 가버렸지.

불쌍한 오펜하이머.
그의 기념비적인 논문과 탁월한 아이디어들은 이후 핵물리학, 양자 전기학, 양자역학, 우주학 등에서 엄청한 뒷받침이 되었는데 끝내 노벨상 하나 받지를 못했다니.

-1930년  < 전자와 양성자 이론에 대해 >
-직접이론'을 이용한 스펙트럼선의 무한 성질에 대한 논문
-「중양자 deuteron 반응에서 양성자의 수율 계산」
 「별 중성자 중핵의안정성」
「거대 중성자 중핵에 관해」
「연속적 중력 수축에관해」

※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서 오펜하이머가 가르친 것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 방식, 디랙의 통합이론 , 장 이론, 파울리의 양자 전기역학.
양자들의 파도입자 이원성(p153)

"우리는 언제쯤 담배로 칠판에 쓰고 분필을 입으로 가져갈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그러지 않았어요"(p 154. James Brady)

● 물리학자들은 오펜하이머의가장 독창적이구놀랄만한 작업은 그가 1930년 말에 했던  중성자별에관한 연구라는 데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p164)

● " 오직 중력장만이 남게 된다."(p165)

● 칼텍의 이론 물리학자인 킵 손은 " 돌이켜 보면 ,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의 작업은 블랙홀의 붕괴를 완벽하고 정확하게수학적으로 기술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학자들이 쏟아내는 결과들은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논문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p165)

그러니까  그의 많은 논문들은 다른 이들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씨앗이 되었고
노벨상을 수상하기에 딱 맞는 독자적이고 선구적인 연구는 시대를 너무나 앞선 내용이어서 역시나 인기를 끌지 못했다는 것.


7장
님 님 소년들


정치가 진실,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6장과 같은 시기 오펜하이머의 다른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6장이  오펜하이머의학문적 성과를 다루었다면 7장에선 오펜하이머의 인간관계와 절정에 이른 교수로서의 경력이 나온다.

오펜하이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
리처드 & 루스 톨먼
어니스트 올랜도 로런스(6장에서 가속기 발명으로 노벨상 수상한 실험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
아서 라이더
로버트 서버
새뮤얼 호우트스미트
조지& 엘제 윌렌베크

이들은 오펜하이머의 뉴멕시코 농장 페로 칼리엔테로 초대받는다.

그리고 정치에 무관심한듯 가장했지만
정치에 관심많은 지인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는 것만 봐도 실상은 정치나 시사 소식에 관심이 많았다는 반증을 만들기도 한다.
7장은 이렇게 끝난다

● 그의 이론작업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연인을 곧 만나게 될 것이었다.(p196)


p197 2부의 시작을 연 강의실의 오펜하이머 교수

 
 

8장
1936년에 내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다

 

 진은 오펜하이머의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사랑과 투쟁

오펜하이머 진짜 사랑을 만나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정치사회활동.
8장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제대로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막연히 의식만 하고 있던 오펜하이머의 정치사상이 각성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때부터 오펜하이머가 만난 인맥은 이제 물리학이라는 이공계를 넘어서는  다양함을 자랑한다.
두드러진 인물은 진 태트록,하콘 슈발리에 그리고 토머스 애디스.

진 태트록은 오펜하이머와도 친분이 있던 존 태트록 교수의 딸.
영문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진 또한 문학에도 조예가 깊지만  프로이트와 특히 융의 심리학에 매료된 뒤론 버클리에서 의학을 공부중인 재원이다.
그러니까 진 태트록이나 오펜하이머나 이공계와 문학계를 아우르는 관심사가 통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

진 태트록은 또한 사회활동에도 열정적이어서 자연스레 오펜하이머도 여러 사회활동을 활발히 펼치게 된다.
당시  1936년 시기라는 것이 미국에서 공산당이 가장 선진적인 활동을 많이 벌이던 때였기에 오펜하이머의 활동은 당연히 좌익적이고 급진적이라는 편견을 받았다.

우습다.
예를 들어 진 태트록이 나중 개원의가 되었을 때 흑인과 하층민 환자들도 가리지 않고 치료하고 미국내 의료보험법 입법을 열렬히 주장했는데 이를 두고 주위에서 급진적이라고 그녀를 평가했다는 것이다.
매카시 이전에도 미국 사회의 보수성은 참 유서가 깊었구나

그리고 하콘 슈발리에
미국 서부의 공산당을 이끄는 핵심 인사다.
뛰어난 불문학자이기도 하다.
슈발리에와 오펜하이머는 곧 깊은 친밀함을 나누었고 이후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 한우정에 대한 이야기」(1965) 라는 회고록도 썼다.

마지막 토마스 에디스
그 역시 미 공산당의 핵심 브레인급 인사였지만 무엇보다 신장병 등 생리학계의 탁월한 의학자이고 의사였다!

이렇듯 1930년대 미 공산당은 인종차별폐지,이주농장노동자의근무환경, 스페인내전의 반파시즘 투쟁지원, 여러 계급계층의 조직화 등에 앞장서 활약해 왔다.

특히 스페인 내전 설명이 반가웠다.
마침 영화 추억( The Way We Were.1973)의   배경도 이 시기거든.
주인공 바바라 스트라이샌드가 대학내 공산당활동 대표고 스페인을 구하자는 유인물을 뿌리며 대학내 동맹휴학을 선동하기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페인 내전.
그라니까 여기도 칠레와 같은 비극을 맞았다는 것이다.
좌익 정부가 선거로 합법적으로 등장했는데 프랑코 파시스트들이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국민들이 들고 있어나 내전이 벌어졌는데
서방은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무기지원을 끊었다.
프랑코는 당연히 히틀러와 무솔리니로부터 지원받았고 말이다 ㅠ
미 정부의 이런 불간섭 정책이 스페인 내전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좌익정부를 깉내 패배한것이지
그러나 미국내 링컨파 독립전쟁의 후예들도 스페인 내전을 지원하기위해 참전했고 세계 곳곳에서도 함께했다

오펜하이머는 나치로부터 탈출하는 유태인 친척들과 친분있던 학자들을 탈출시키고 지원하는데 아낌없이 비용을 기부해왔다.
그리고 이제 스페인 내전에서 반파시스트들을 위한 지원에서 큰 돈을 지속적으로 기부해왔다.

오펜하이며는 여러모로 진을 만나며 자신의 이전 삶에서 보인 약점들을 극복하는 계기를 만난다.
진이 관심갖는 심리학을 통해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고
진과 함께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청소년 시절 유태교 개혁교단 학교에서 배운 사회참여를 실천하기도 한 것이다.

 

●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이있었고,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못한 직장을 구할 수 밖에 없었고 심지어 아예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이토록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p 205)
 

 

 
9장
프랭크가 그것을 잘라서 보냈다


우리는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고 가입하지 않기도 했다.
당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9장의 주인공은 오펜하이머의  8살 아래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
그는 '까칠하지 않은 ' 오펜하이머란 평을 받을 만큼 오펜하이머처럼 똑똑한 사람이었다.
프랑크는 곧 형처럼 물리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프랑크는 공산당에도 가입하며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벌었다.

이쯤되면 오펀하이머도 공산당원이었나라는 의문이 들것이다.
9장의 나머지는 그가 공산당원이었는지 여부에 대한 다양안 사람들의 증언이 나온다.

FBI는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이었는지의 여부를 영원히가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가 당원이었다는 증거가 희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오직 오펜하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자신이 공산당 담적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p249)

● 그의 좌익활동이 정치적 순진함에서 기인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은 헛소리에 부과하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깊이 있게 정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함의를 볼 수 있었던 사람의 지적 능력을 모독하는 것이다.(p 247)  


 

10장
점점 더 확실하게



'점점 더 확실하게'  more and more surely
는 오펜하이머가 즐겨 쓴 어휘라고 한다.
그는 이런 표현들을 사용해서 공산당의 팸플릿을 함께 작성해왔다.
그러함에도 추후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고 부인한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관해 가장 중요한 사실은 , 그가 1930년대에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했다는 것이다.(p 266)

오펜하이머가 대폭 교정을 본
공산당 시국 팜플렛(p256).

좋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굶지 않도록 해주어야 하며,그들을 폭력적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한다. 오늘날 극도로 심각해진 실업과 전쟁의 위협으로인해 우리 사회의구성원들은 과연 사회가가장 필수적인 의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 물을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에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한다.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과거의 상위문화로 특징지었던 교육의기회와 자유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초적인 요구를 무시하는 문화, 기회를 거부하고 인간의 욕구에 무관심한 문화는 솔직할 수도 없고 유익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p255)

 

빈민 구제예산을 삭감한 것과 동시에 무기생산 예산을 늘린 것은 우연의소산이 아니다.
루스벨트의 사회개혁프로그램의 포기, 노동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 그리고 전쟁준비는 모두 연관된 움직임들이다.(p255)

 

진보적 방향으로 가려는 대책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과거에 시행되었던 대책들마저 반동적 공세로부터 지키지 못했다.(p255)

 

11장
스티브, 나는 당신의 친구와 결혼할 겁니다

 

 

 

 키티라는 여자

진 태틀록과는 어쩌다 헤어지게 된걸까
앞서 9장에 잠깐 진 태틀록의 죽음이 언급되는데 혹시 이것때문에 둘이 헤어진걸까?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진에게 차였고 그래도 진을 못잊던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거였다.

그녀의 이름은 키티.
11장에선 장장 그녀의 결혼 전사가 이어진다.
첫결혼은 동성애자였대서 아예 결혼 무효 판결을 받고 세번째 결혼 상태에서 오펜하이머를 만나 두 남자가 호기롭게 이혼을 합의하다?
그녀의 두번째 결혼이야기는  극적이긴 했다.
공산주의자 남편을 스페인내전에서 잃은 비극.
헤어졌다 다시 만나며 전쟁터에도 함께 나갈것을 결의했던 부부.

그리고 오펜하이머와의 결혼으로 키티라는 여자는 오랜 방황을 끝냈다.
오펜하이머는 그녀가 바란 모든 것을 갖춘 남자였다.
지적이고 카리스마있고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있었다.
자식까지 낳으며 그렇게 크고 넓은 저택에서 행복한 삶을 꾸려가는 오펜하이머 부부다.

* 그런데 사진을 보면 묘사된 것만큼 키티가 그렇게 미인인줄은 모르겠다 ㅎ

영화 속 에밀리블런트가 훨 상상 속 키티와 닮았다


 
12장
우리는 뉴딜을 왼쪽으로 겨냥하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공산당 및 좌익활동' 은 오펜하이머 스스로 중단하거나 회의감을 갖고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공산당 활동은 그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에 나온 자연스런 양심의 소산이었다.
때문에 나치 독일이 핵을 먼저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그를 어서 빨리 나라를 도와 핵개발 전선에 합류하도록 이끌었다.
그러기위해서 그의 좌익활동이 발목을 잡게 해선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의 친구 로런스가 핵개발에 있어 오펜하이머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당시 고급지식인들의 노조결성이라는 이슈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은 비겁한 낙오가 아니라 더큰 대의를 위한 방향전환일 뿐이었다.

그정도로 오펜하이머는 나치독일을 패배시켜야 한다는 당위가 컸다.
한편 조 와인버그 같은 오펜하이머 추종자들은 공산주의 세력이 당시 나치에 대항하는 유일한 세력인 것 때문에 공산당에 호의를 가졌다.
이 장면을 보니 영화 '조조래빗' 이 생각났다.
조조의 엄마도 공산주의자로서 나치독일의 거점 베를린 한복판에서  반나치활동을 벌이다가 공개 교수형을 당했다.

이쯤에서 공산주의와 반보수/ 인권민주 지향주의는 무엇일까 고민해본다.
빅토르 하라는 사회주의자이고 파블로 네루다는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그 둘의 차이는 뭘까?
둘 다 칠레민중의 고혈을 쥐어짜는 친미자본가들과  군부에  맞서 싸우며 개혁과 복지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었다.

오펜하이머도 그랬다.
그를 아는 이 대부분 동의하듯 그가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는 크게 신경쓰지않았다.
(지배권력층만 신경썼다)
오펜하이머는 그저 나치를 반대했고
프랑코 파시스트로부터 스페인민중을 구하고 싶어했다.
하층민들의 삶이 바뀌려면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중에 미국을 핵 패권주의로 무장하려는 군부는 그에게서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해댔다.

1930년대 미국이나 우리 1930년대에서 해방정국까지
김구 등 한독당만 빼고
민족과 민중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다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오직 공산주의( 혹 사회주의) 세력들만이 남한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친일청산, 미군철수와 통일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4월 3일 이후 지독한 제노사이드를 당했다 .
한국은 그랬고 미국에선 어떻게되었을까?
책 더 봐야한다.


조 와인버그가 혹시 라미말렉?

오펜하이머 사단
-
필립 모리슨, 조바니 로시로마니츠, 데이비드 봄,막스 프리드먼
- 데이비드 호킨스 철학과 마틴 카멘 화학과


 

13장
고속 분열 코디네이터

 
 

대략의 오펜하이머 스토리는 이렇다
세계 최초 핵무기를만들어낸 맨하탄 프로젝트의 수장이 자신의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는 데로 돌아서며 정가의 타겟이 되다.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는 앞서 8장부터 12장까지 오펜하이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공산주의자들과 한목소리를 내고 유의미한 활동들을 벌여왔는지를 보아왔다.
이제 오펜하이머 인생에  보다 극적인 장으로 전환될텐데 여기서 그의 지난 사상적 경력이 발목을 잡는 것을 본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단순히 사상적인 절연 뿐아니라 그의 리더쉽 등으로
그를 평소 익히 알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핵무기 개발연구팀의 수장이 된다.
그가 군 수뇌부의 우려까지 감당하면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레슬리 그로브스라는 육군 간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연구팀을 포함한 전체 계획의 총책임자가 되었는데 그의 성격은 정말이지 불도저 같았다.
그런 그로브스가 오펜하이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전까진 로런스가 오펜하이머를 이끌었고 말이다.
둘은 좌익이라면 치를 떠는 보수주의자들이다.
좌우를 넘나드는 애정을 받았던 오펜하이머다.

한편 오펜하이머와 아내 키티의 친구인 스티브 넬슨이 FBI 혹은 육군내 방첩 부서의 표적이 된다.
넬슨과 ' 조' 라는 인물의 대화를 도청했는데
이를 통해 오펜하이머의 핵심 제자들이 모두 오펜하이머와 격리되는 시련을 겪는다.
징집되거나 해고당하는 조 와인버그, 로마니츠, 프리든 그리고 데이비드 봄이다.
오펜하이머는 확실히 소련과 미국 양쪽에서 주시하는 세계적 거물이었다.


레오 질라르드 -" (독일이 만들지도 모를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 에 대해 경고문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다.=> 아인슈타인의 루스벨트 서한

임시 우라늄 위원회 구성
영국 - MAUD 보고서작성, 우라늄으로 폭탄개발가능

과학연구개발국 설립 - 바네바 부시
백악관직속 S-1 위원회설립- 바네바부시, 제임스 코넌트, 핸리 스팀슨, 조지 캐틀렛 마셜

1941년 오펜하이머 고속중성자관련연구책임자 승진
이어 S-1고속중성자연구책임자로 임명
=> 고속분열코디네이터

1941 여름세미나 - 한스 베테, 서버 ,에드워드 텔러, 펠릭스 블로흐 , 에밀 코노핀스키, 로버트 서버

바네바 부시, 제임스 코넌트, 레슬리 그로브스
- 오펜하이머를 맨하탄프로젝트 연구책임자로임명하라고 당국 압박

1842년 10월 오펜하이머 프로젝트 총책임자 임명

 
14장
슈발리에 사건

 
 
사건의 전모는 단순하다.
하콘 슈발리에 부부와 오펜하이머 부부는 아주 각별한 사이다.
하콘이 오펜하이머에게 극비 개발 정보를 소련에 넘겨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고 오펜하이머는 단호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저자는 '고전 그리스와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비교하는것이 적절할 정도로 오펜하이머의 여생을 바꿔놓았다(p337) 말했다.
심지어 영화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을 연상케한다고도 했다.

도대체 왜 그렇다는 것인지 이 장을 읽고는 공감이 가질 않는다.
그저 다만 오펜하이머와 슈발리에 그리고 슈발리에를 통해 정.보유출을 처음 제안했던 조지 엘텐튼이란 사람 셋의 삼각확인을 통해 진술의 신빙성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리고 엘텐튼이란 사람이 러시아 스파이란 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증언들을 덧붙인다.
이래저래 오펜하이머는  격랑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15장
그는 대단한 애국자가 되었다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라는 곳.
맨하탄 프로젝트의 핵심 거점이다. 
오펜하이머가 여길 추천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물리학과 여기 로스앨러모스를 최애로 꼽아왔던 오펜하이머
ㅣ애국적 열정뿐 아니라 일생일대 최대의 도전을 맞은 그였으니 그가 최고로 사랑하고 마음 편히 여기는 곳을 거점으로 삼으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곳에서 오펜하이머는 수십명의 과학자를 모집하고 연구단위를 조직하며 연구 주제의 논의들을 이끌어간다. 
그는 그리하야 과학자가 아니라 정부관리자나 기업가처럼 능수능란하게 행동했다. 
척하면 척이란 말이 딱 어울릴 것같다. 
모르는 사람은 그가 일을 미루고 모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어느순간 달려들면 말도 꺼내기 전에 요구하는 바가 뭔지를 알아 바로 진행시킨다. 
 
나중에 수천명으로 늘어난 로스앨러모스 연구단지 사람들 중에 오펜하이머는 단연 돋보이고 단연 숭배받을 만한 인물로 부상한다. 

● 오펜하이머의 추종자들은 로스엘러모스에서 급속하게 늘어났다(p364)

● 제한된 자원과 무제한의 시간을 가지고 일하는데 익숙해 있던 과학자들은 거의 무제한적으로 제공되는자원과 엄격한 마감시간에 적응해야만 했다.(p368)

 
16장
너무 많은 비밀


 
맨하탄 프로젝트의 총책임부서는 육군이었다. 
육군 지휘하에 오펜하이머가 과학자 그룹을 이끌며 산업적이고 재정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핵폭탄을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육군은 FBI를 협력 기관으로 부려먹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과학자 그룹과 군인그룹이 한군데 모인 일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래서 당연히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를 못했다. 
군당국은 핵물리학 연구 성과들이 각 부서를 넘어서는 공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구획화 주의를 넘어서 교류와 소통을 통해 연구의 빠른 진전을 원했다. 
자유로운 학자들은 사사건건 보안규칙을 주장하는 군당국과 싸웠다. 
 
거기에 중요한 변수는 과학자그룹을 성공적으로 잘 이끌고 있는 최고의 리더 오펜하이머가 사실은 군당국이 가장 질색팔색을 하는 공산주의 활동전력을 가진 이였다는 사실. 그리하여 모든 과학자그룹의 불평불만을 넘어서는 최고의 감시와 끊임없는 견제의 고통에 시달린 이는 오펜하이머였다. 
 
놀라운 것은 오펜하이머와 진 태트록의 불륜관계다. 물론 딱 한번이었겠지만 그와 그녀가 만나고 하룻밤 같이 지낸 모든 여정이 FBI의 감시망에 다 기록이 되었고나중에 군 청문회때 이사 실이 공개되었다는 것.
정말이지 넘나 드라마틱한 오펜하이머의 삶이다
 

 
17장
오페하이머는 진실을 말하고있다

 


 아까 14장 슈발리에사건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제자인 로마노츠가 그의 공산주의 활동 전력으로 프로젝트에서 해고된 것에 반발하는 오펜하이머.
그러나 한편을 자신을 옥죄어오는 육군 보안부서의 압박을 의식하여 신변관리에 들어간다.
그때서야 오펜하이머는 육개월전 슈발리에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는 이 사건을 자발적으로 육군 보안담당관에게 신고했는더 이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영화 <라쇼몽>이 무슨 이야기인지?

암튼 오펜하이머는 엘텐튼 선에서 실명을 언급하고 슈발리에는 한사코 공개하지 않고 버틴다.
그로브스나  렌즈베리 등 오펜하이머를 신뢰하는 담당자들은 그의 그런 입장을 존중했다.
나중에 슈발리에의 이름이 결국 실토되긴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거기까지였다.

오펜하이머는 핵을 만들기 위반 고생만큼이나 사상으로 인해 참으로 고된 싸움을 했겠구나!
안스럽다


18장
동기가 불분명한 자살

 
 

진 태트록이 자살했다!
정말이지 극적인 오펜하이머의 삶이다.

진 태트록의 자살은 오펜하이머의 공산주의 활동 경력을 가지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보리스 패시에게 암살혐의가 쓰워지기도 했다.
보리스패시라는 인간은 슈발리에 사건 관련  세명의 오펜하이머 제자들을 납치해서 먼 바다에서 수장시켜버릴 생각도 공공연하게 떠들던 인물이다.
참 살벌한 1940년대 미 정가다

 
19장
그녀를 입양할 생각이있습니까

 


1943년 로스앨러모스 연구단지가 건설되고 사람들이 입주한 이래 이곳 수천명의 급작스런 생활공동체의 소소한 일상과 삶이  소개된다.
대부분 젊은 부부들과 또 젊은 독신 남녀들의 군당국의 통제를 받는 밀폐된 오지에 모인 것  이다.
로스앨러모스의 아름다운 경치가 우선 언급된다.
토머스 만의 「마의산」이 떠오르는 절경이라고 한다(p430)

그 속에서 오펜하이머와 키티부부의 생활이 자세히 나오는데 나는 어째 키티에 대해서 더욱 호감이 가지 않아진다.
이래저래  이상주의자 오펜하이머를 현실세계로 끌어내린 속물스러운 사람이란 느낌을 벗을 수 없다.세간의 평이 그렇다
물론 중립적인 언어로 오펜하이머를 안정시켰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리고 캠프내 사람들이 나름 적응을 하며 잘 살아가는 모습들.
그런 안정뒤에는 오펜하이머가 군과 중재를 잘하며 구성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 애쓴 노력이 있었다.
심지어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직접 망가진 모습으로 연극판에서 구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펜하이머는 캠프 내 절대적 정신적 구심이 되어있었다.그리고 그의 아내 키티는 그런 남편을 잘 내조하지 못해 남녀 모두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그런면이 오펜하이머를 그녀 곁에서 편안히 여기게 된 이유였을 수도.

"키티는 서슴지않고 남편의말을 끊었지만 한 가까운 친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아무럽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 했어요(p438)

오펜하이머는 참 대인배다.
하긴 본인도 대스승의 말을 끊고 강단을 가로채기까지 했으니 ㅎ
자기가 악의가 없으니 남도 악의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순진함일까

지금껏 오펜하이머의 삶의 여정을 봐오면
오펜하이머는 참 편견없이 사람을 대하고 인정하는 것 같다.
당장에 그로브스같은 인물과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참 내면이 깊은 사람인것 같다.


 

20장
보어가 신이라면 오피는 그의 예언자였다

 
그들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내 도움을 필요로하지않았다.-닐스 보어

 
 
 
경주의 시작

1. 유럽출신 과학자들의 우려.
독일의 옛 동료들이 핵분열의 발견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읏 먼저 찾지 않을까

2. 과학자들 행동에 나서 미국정부에 경고
3. 정부는 관련학회와 소규모 핵 연구프로젝트 지원
4. 오토 프리슈와 루돌프 파이얼스가 전쟁중 사용가능한 원자폭탄 제조법 고안

닐스보어

이 쯤에서 닐스 보어와 오펜하이머의 만남을 정리한다.
하버드 대학시절 닐스 보어가 초청강사로 온적있었고 이때 수강생이었던 오펜하이머는 보어와 통한다는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오펜하이머가 영국 켐브리지시 1년 있을동안 지도교수 러더퍼드의 사무실서 잠깐 만남이 두번째였다.
그때 보어와 오펜하이머는 참 선문답같은 대답을 주고 받았는데 이 대화만으로도
둘은 서로에 대해 강렬히 기억하게 되었다.

보어 : 잘 되고 있나요?
오피 :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어요
보어 : 수학적인 어려움입니까? 물리적인 어려움입니까?
오피 : 잘 모르겠습니다
보어 : 안좋은 상황이군요
(p106 .3장)

보어는 나치점령의 네덜란드를 탈출해 나치스의 암살위기를 뚫고 탈출용 공군비행기에서 산소부족의고통도 이기고 영국으로 최종 안착했다.

그곳에서 보어는 소련과 영미가 동맹국간에 핵무기 정보를 공유하며 핵의 평화사용을 위해 미리 선행조치를 해두자고 처칠 그리고 루스벨트를 만나고 다녔다.
그는 놀랄만큼 열정과 사명을 가지고 그렇게 고위층을 마구 만나고 다녔는데 이것이 그로브스등 미 육군 보안부서 사람들에게는' 말썽꾸러기'(p453) 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보어는 오펜하이머가 총지휘하고 있는 로스앨러모스 핵무기 연구개발단지도 방문했다.
보어의 방문 장면이 정말 웃겼다.
그로브스가 출발지에서부터 내내 감시도 하고 연구단지내 기밀유지에 대해 그렇게 바짝붙어 내내 신신당부를 했는데 도착한지 5분도 안되어 하지말란 말을 바로 꺼냈더라고 ㅎㅎㅎ

이곳에서 보어와 오펜하이머의 만남 장면은 참 훈훈하고 좋다.
보어도 오펜하이머처럼 작고 조용조용한 말투에 철학과 명상이 섞인 참 고급진 언어를 쓴다는 것.
무엇보다 점잖고 잘생긴 풍모를 갖췄다는 점 또한 그렇고

그러니 '보어가 신이라면 오피는 그의 예언자였다'는 문구처럼 둘 사이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핵을 포함한 과학의 열린 공유를 주장했던 보어와 이를 적극 공감하는 오펜하이머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는 과학적 가치에 기반을 둔 '열린 세계' 에서만 가능은 것이었다.

보어에게 과학 탐구의공동체적 문화는 진보와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것과 동시에 평화도 일구어낼 수 있었다'(p459)


'지식은 그 자체로 문명의 기반이다. 그러나 지식의 폭을 넓히는것은 인간생활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게 보다 많은 책임감을 지운다.'(p459)

 
 
21장
장치가 문명에미치는 영향



 

로스앨러모스 연구캠프 안에서 자신들이 만드는 원자폭탄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벌어지는 풍경을 담았다.
나치스를 이기고 전쟁을 끝내는 목적도 중요했지만 그 방법으로 어마무시한 대량살상무기를 쓴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가진 것은 자연스럽다.
나는 이 이공계 연구자들이 그런 양심적 숙려를 하는 분위기가 참 부럽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동료 (?) 종사자인 간호사들 부려먹고 , 의료실수를 감추려하고 , 의학과 의술보다 고소득만 추구하는 대단히 이기적인 길드가 되어있는데 말이지.

아무튼 원자폭탄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사용에 대해 당시 과학자들이 어디까지 진출했느냐하면 나치와 대항하여 희생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는 '명백한 동맹국' 소련에게 자발적으로 핵개발 연구자료를 갖다바치는
소위 '자생적 스파이' 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테드 훌.
그는 평소 그저 의식있는 과학자였을 뿐이지만  닐스 보어의 영향을 받아 소련을 돕기로한 것이다.

한편 1944년 당시 연구캠프 안에서는 핵폭발물 형태에 대한 토론이 치열했다.
내파형이냐 총구형(포신형)이냐 등의 기술적 공학적 문제였다.
오펜하이머는 모든 자료를 검토하며 이것을 반대했다가 다시 검토하는 등 앞선 윤리적 토론, 기술적 토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캠프내 진정한 리더로 더더욱 굳센 신임을 받는다

 
22장
이제 우리는 개새끼들이었다.

폭탄사용전야

22장의 전반부는 두 가지가 핵심이다.
폭탄의 대인사용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입장과 원자폭탄의 사용의 실질적 전술적 효용 두 가지 진실.

오펜하이머는 보어와 같은 입장이라는 말은 계속 강조되고 있다.
핵을 사용하되 동맹국 소련과 공유함으로써 핵경쟁을 하지말고 평화적 사용을 하자.
그러나 이 입장은 미국 대통령과 국무부장관 등에 의해 차단된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더이상 이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독일이 패전하고 히틀러도 자살하자 나치타도를 위해 무기개발에 매진했던 과학자들은 돌연 무기개발을 계속해도 될것인지 회의감에 빠진다.
이를 앞장선 것은 질라르드라는 시카고 야금소쪽 과학자였다.
그는 애초 독일보다 앞서 우라늄을 활용한 거대폭탄을 만들어야한다고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핵이 너무도 가공할 무기이기에 그리고 핵이 퍼져 무기경쟁에 쓰일것이  끔찍했던 질라르드는 동료과학자들과 서명운동을 벌인다.
트루먼대통령을 만나는데도 실패하고 오펜하이머를 설득하는데도 실패하는 질라르드.

그렇다
오펜하이머는 독일이 아니면 일본을 상대로라도 사용해서 선점의 효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보어의 입장이란 압도적 파워를 보임으로써 상대방 혹은 적국이 맞대응 의사를 상실케 할정도가 되게 하자는 취지!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질라르드 등이 주장하는
사막등에서의 가시적 시범사용에 그치자는 주장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 시기 오펜하이머는 분명 전쟁을 확실히 끝내기 위해 적국 일본 본토에 민간인 여부를 가리지말고 폭탄을 쓰자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실제 전황 혹은 정세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독일은 패망했지만 일본이 버티고 있던 태평양 전선
그러나 사실 일본은 진즉에 항복의사가 있었다.
천황과 헌법만 유지시켜준다면 언제고 항복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미국으로서는 전쟁을 종식할 좋은 명분과 기회였다.
그러나 원자폭탄개발이 임박해오자 미 육군은 새로운 카드를 갖고 욕심을 부린 것.
미국은 핵을 빨리 써서 소련보다 앞서 일본을 선점한다는 계획이다.
8월 15일은 원래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

그러니 트루먼과 미 육군은 오펜하이머와 로스앨러모스를 다그친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발사가 결정되었다.
7월 15일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한달전이다.

긴장속에서 폭발전야를 보낸 과학자들과 오펜하이머.
트리니티로 명명된 시험폭탄 폭발 실험은 성공했다.

나는 다시금 우리 광복군의 본토 진공작전이 실패한것이애석하다
광복의 주인이 되지못하고
미소 점령군의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우리민족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 ㅠ

● 나는 스팀슨이 대일본 공습에 항의하는 미국인들의 시위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도쿄의 경우엔 대단히 많은 사상자가 있었지요.
그는 공습을 중단해야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이 나라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p489 오펜하이머)

 

23장
불쌍한 사람들

 
 

히로시마 그리고 나가사키

8월 6일에 히로시마 그리고 8월 10일 나가사키에 각각 다른 종류의 원폭이 투하되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건 애초 디자인한 총구형 폭탄이었고 나가사키에는지난 트리니티로 이름했던 내폭형 디자인이었다.

로버트 윌슨이라는 오펜하이머의 조수는 진즉부터 이 폭탄의 사용에 우울해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떨어질 걸 알게된 이후부터 극도의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는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비로소 실감을 하는 것이다.
친구 라비가 왜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길 꺼리고 프로젝트 자체를 반대했었는지.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실상을 마주한다.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에 원자폭탄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은 약속했던것처럼 핵투하정보를 소련에 솔직하게 공유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된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제자 서버와 필립 모리슨이 나가사키를 직접 방문했다.

"마침내 히로시마 상공을 저공 비행했을 때 놀라움에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날밤 비행기 수백대가 이 도시를공격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한대의폭격기와 하나의폭탄이 총탄이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을 만한 시간 동안에 인구 30만명의 도시를 불타는 장작더리로 만들었습니다."(p534)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 우리는잘 익은 과일이 많이달린 나무를 세게 흔들어 레이더와 원자폭탄을 만들었습니다.우리는이미 잘 알려진 지식
을 광적이고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p535)

 
24장
내 손에는 피가 묻어있는 것 같다

 

슬픈 장이다.
오펜하이머는 전 미국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이 유명세를 활용해 미국의 핵정책을 바꾸고 싶어했다.

로스앨라모스의과학자들도 조직을 만들어 입장문을 채택했다.
로스앨러모스 과학자 협회.
여기에 한스베테, 프랭크 오펜하이머,로버트 크리스티 등은 알겠는데 에드워드 텔러는 의외다.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를 유지해서 슈퍼폭탄을 만들고 싶어했고 이 문제로 오펜하이머와 갈라선다.

과학자들의 채택한 입장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무기경쟁은 위험하다
2) 앞으로 원자폭탄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3) 원자폭탄의국제통제가 필요하다(p539)

워싱턴의 입장
트루먼은 초반 동의하는 성명을 발표하다.
문제는  메이-존슨 법안에서 군이 과학자와 원자폭탄의  통제권을 갖도록 하는 문제어다.
로버트 윌슨은 군의반대를 무릅쓰고 로스앨러모스 과학자 협회의 핵관력 정책 입장문을 언론에 터뜨렸고 이에 다른 과학자들도 각방으로 이 법안을 무력화시키기위해 애썼다.

전 부통령  헨리 월리스는 기억한다.
"원자 폭탄 과학자들의 죄책감은 내가 본 것중 가장 놀라운 것이다."(p550)

오펜하이머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에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슈가블루스」에서 미 대통령을 직접만나 설탕억제정책을 호소하려던 당시 운동책임자.그의 뻣뻣하고 세련되지 못한 대응이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 미국은 설탕을 통제하지 못하고 설탕 범벅의 나라가 되었더라는 통렬한 역사가 잊혀지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능수능란해진 연설가이자 기본적인 달변가였던 오펜하이머는  이자리에서 오히려 맥을 놓았고 상대방 트루먼 대통령을 분노케 한 말을 뱉은 것이다.

"내 손에는 피가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트루먼은 굉장히 화가 났다고 한다.
내가보기엔 그 말이 트루먼의 그나마 감춰져있던 죄의식을 건드린 말이었나보다.
진실한 사람은 그런 말에  반성과 각성으로 돌아서지만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분노와 회피를 낳는다.

역사는 이렇듯 인간의 연약함이 빚은 
고의적이지않은 실수에서도 사달이 일어나는 것 같다 ㅠ

로스앨러모스를 떠나며 남은 연구진들에게 연설을 하는 오펜하이머.
그의 한 시간짜리 무원고 연설은 강당의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감동의 연설이었다.

 우리는 1억 4000만명일 뿐이고 지구에는 20억명이 살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관점과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확신해도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는것으로는 합의에 이룰 수 없습니다.(p555)

● 세계는 이미 바뀌었다.
미국인들이 단독 행동을 강행한다면 위태로움을 자초할 것이다.(p556)

● 강물의 노래가 협곡으로부터 들려오고 속세의 요구가 이 조용한 장소에까지 도달할때, 두 분을 생각할 것입니다.(p556)
 

 
 

25장 
누군가 뉴욕을 파괴할 수도 있다.

 
 

계속해서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핵정책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에서 두 명의 악당.
1945년 당시 FBI국장 에드거 후버.
이 냥반 유명한 이름인데 왜 유명한지는 까먹었다.
닥치는대로 유력 정치인들을 도청하고 약점으 파고 다닌다.
그리고 그가 오펜하이머를 노린다.오펜하이머를 공산당원이자 소련의 협력자라고 뒤집어 씌울 증거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그리고 버나드 바루크.
그는 월스트리트 투자가이고 호전적인 국무장관 번즈와 친했다.
바루크가 원자력 위원회 설립에대한 자문위원회의 제안을 소련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자체가 오펜하이머가 그토록 주창한 원자력통제정책의 실패를 의미했다.

1946년 3월 핵무기 국제 통제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
 의장 애치슨, 존 맥클로이, 바네바 부시, 제임스 코넌트, 레슬리 그로브스

자문위원회
- 의장 리리엔털, 체스터 바너드, 찰스 토머스, 해리 윈,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의 권고안
- 현대과학의 국제주의
- 원자력에너지 국제기구가 원자력에너지 주권소유
" 세계 정부없이는 영구적 평화를 얻을 수 없고 평화가 없다면 세계는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p568)

바루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펜하이머 권고안을 완전 뒤바꾸어 소련을 자극하는 제안서로 만들어버렸다.
소련만 우라늄 통제권을 내놓으란 식이었다.
1950년대 역사를 보면 확실히 소련은 상식이 있었다.소련은 바루크 안을 거절하고 차라리 양국이 핵의 개발을 포기하자고 권했다.
얼핏 순진해보이는 제안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이후 판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예언하듯 말했다.

" 미국은 이 문제에대해 서두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보고서는 제출될 것이고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고 미국은 소련이 전쟁의사가 있어서 그렇다고 할 것이고 이후 전쟁준비를 하겠지.
 육군은 연구활동을 지휘할 것이고 공산주의자 사냥이 시작되겠지.
노조는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을 것이고 반역죄로 몰릴거야
."(p573)

오펜하이머는 좌절한다.
" 나는 그동안 내 인생이나 다름없었던 물리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것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p578)

이어서 오펜하이머의 통렬한 자기 고백

"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또 한번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다면 핵무기가 사용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전쟁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되고 인도적인 두 나라라고 생각하는 영국과 미국이 사실상 패배한 적국에 대항해  핵무기를 사용한 것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p577)

충격적이지만 당연한 사실.

● 우라늄과 플루토늄은 어떤 방식으로 변성시켜두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다.(p567)

 


26장
오피는 뾰루지가 났지만 이제는 면역이 생겼다.

 

오펜하이머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다.
칼텍 교수로  돌아왔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교수생활의 의욕을 잃은 오펜하이머.
버클리 케임브리지 공과대학 교수로도 복귀한다.
그리고 맥마혼 법에 의해 설립된 원자력 에너지 위완회 위원으로 위촉.
의장 릴리엔털.
자문위원회 :
이지도어 라비,글렌 시보그, 엔리코 페르미, 제임스 코넌트, 시릴 스미스, 하틀리 로,후드 워싱턴, 리 듀브리지
* 하버드 이사회 이사 시인
아치볼트 매클리시와의 친분

"나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보다 을씬 미묘한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난 150년의 경험으로 인해점점 강하게느끼게 된 것믄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p587)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등장.
원자력 에너지위원회 위원.
오펜하이머를 프리스턴 고등 연구소 이직 제안



 

27장
지식인을 위한 호텔



1947년 7월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와는 대륙 반대편 프리스턴 .
그곳에서 오펜하이머는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고등연구소는 어느 부유한 사업가가 출연해 세운 연구전문기관인데 " 쓸모없는 지식의 유용함" (p614) 을 모토로 하고 있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수학과 물리학 위주의 종신교수직 멤버들이 많았던 연구소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초청해 최고수준의 학문과 지식이 소통되고 생산되는 곳으로 바꾸려 노력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이곳을 ' 지식인을 위한 호텔' 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물리학이나 수학연구를 홀대하지도 않았다.
아직 프리스턴에 들어서기 한달 전  오펜하이머는 이론물리학 토론을 주재한다.
한스 베테, 이지도어 라비, 리처드 파인만, 빅터 바이스코프, 에드워드 텔러, 조지 윌렌베크, 줄리언 슈윙거, 데이비드 봄, 로버트 마르샤크, 윌리스 램, 핸드릭 크라머.

그리고 에이브러햄 페이스, 프리먼 다이슨, 닐스 보어, 폴 디랙, 볼프강 파울리, 유카와 히데키,조지 윌렌베크, 조지 플라첵, 도노나가 신이치로, 양전닝을 영입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분위기를 묘사한 대표적인 글이 있다.

"이곳은 비현실적인 곳이다. 보어가 내 사무실에 들어와 이야기 한다. 창밖을 내다보면 아인슈타인이 조수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 옆 사무실에는  디랙이 앉아있다. 아래층에는 오펜하이머가 있다."(p619)

당시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과학자들이 다 모인 곳이었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둘은 학문적으로는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존중했다.
알려졌다시피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거든.

27장에 묘사된 고등연구소의 괴짜들 모음
-괴델, 디랙, 노이만

 

28장
그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
1948년 <<타임>>의 휘태커 체임버스가 뉴딜정부 국무부 관리 일저 히스가 공산당원이라고 폭로
1949년 반미활동 조사위, 오펜하이머의 네 제자 조사 개시
       데이비드 봄, 로시 로마니츠, 막스 프리드먼, 조지프 와인버그
1949년 봄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미네소타 대학에서조차  해고
 원자력 에너지 합동 위원회 공개회의서 루이스 스트라우스 공개 조롱당하다..
 


 
29장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물건들을 내던진 이유

 


 
프린스턴에서의 오펜하이머 가족의 삶을 소개한다. 
겉으로는 고등연구소 소장이라는 지역 거대 셀럽 부부의 삶이 안정적으로 보인다.
명사 오펜하이머 가족의 삶은 TIME 지등 유명 잡지와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그러나 가까운 이들이 이들 부부의 위태위태한 삶을 증언하고 있다. 
키티는 여기서도 좋은 평가가 별로 없다. 
변덕스럽고 지나치게 격정적이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냉정하고 내성적이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오펜하이머가 키티에게 더욱 그러하단다. 
오펜하이머의 주치의 헴펠만 박사는 이를 '헌신적'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오펜하이머는 키티의 문제들을 비난하지 않고 그저 인내로써 감당하며 부부관계를 유지하기로 작정한 것으로 본다, 작가들은!
키티부부와 자식들 관계는?
그렇게 조력자들이 많았음에도 부무노릇이 서툰 두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없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지와 편견에서 방임하기도 하고.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식은 내 맘대로 안되는 법이란 진리를 오펜하이머의 삶에서도 보는구나 .
 
이렇듯 다층적인 오펜하이머 부부의 생활상 보고는 유명한 시 한편으로 마감된다 
 
 

하나님이 맨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에 
곁에 축복의 잔들이 있었다.

(중간생략)
 그래도 그 나머지를 갖게 해 주자.
그러나 그것들은 초조한 불안으로 갖게 해 주자
인간을 부유하면서도 권태롭게 하자. 그러면 적어도,
 만일 신이 그를 이끌지 못하면, 권태가
그를 내 가슴에 던져 올릴 수 있도록.
<<도르래 The Pulley>> . 조지 허버트 George Herbert 




 

30장
그는 자신의 의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 원자폭탄 - 핵분열 에너지
    수소폭탄 - 행융합 에너지
 
격랑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오펜하이머
 
1949년 8월 29일 소련 카자흐스탄에서 원자폭탄 실험
1949년 10월 28일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18차 회의
1949년 10월 30일 프린스턴에서 오펜하이머와 조지 캐넌의 만남
1949년 12월 30일경 조지 캐넌의 제안서 작성
1950년 1월 2일 조지 캐넌, 애치슨에 제안서 보냄
1950년 1월 29일 텔러와 오펜하이머의 만남
1950년 1월 30일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합동윈원회 참석
1950년 1월 31일 릴리엔탈, 애치슨 , 국방부장관 루이스 존슨 3인 트루먼 면담
                           슈퍼폭탄(수소폭탄) 개발 추진 결정
이후
조지 캐넌에서 폴 니츠로 국무부 정책기획국장 교체.
1950년 4월         미 국무부 폴 니츠 NSC-68 문서 작성 
1950년 2월 12일 토크쇼에서 오펜하이머, 미 핵정책 비난
 
1950년대 말 미 핵 18000기 보유
 
지난 5년동안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가진 스타 과학자로서의 명성과 신분을 이용해 워싱턴의 국가 안보 체제를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려고 했다. 필립 모리슨, 로버트 서버, 프랭크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그의 오랜 좌익 친구들은 이것이 가망없는 도박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 1946년에 미국의 원자 폭탄에 대한 국제 통제를 제안하는 애치슨릴리엔탈 계획이 트루먼 대통령이 바루크를 임명하면서 좌절됐을 때 그는 이미 한번 실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대통렬과 각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트러먼 정부는 이제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보다 1,000배나 강력한 폭탄을 개발하는 프로글매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문제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점점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점점 의심을 사게 되었지만, 여전히 체제 내의 사람으로 남아있었다. (p 710)
 
 
 

31장
오피에 대한 어두운 말들 

 

 
 
※ 작전명 MIKE : 미 공군의 첫번째 열핵 폭탄 실험. 1952년 10월 태평양 엘루겔라브 섬 폭멸
※ 코넌트의 발언 
 1952년 6월 번디의 집에서
오펜하이머 패널 입장문으로 반영
 " (미국이 만들려는 슈퍼) 폭탄은 소련을 위협하는 무기일뿐아니라 소련에 의해 미국에서도 터질 수 있다 ."
"( 이 사태에 대한 ) 일반 국민의 무지만큼이나 미군부 지도자들의 군사력 제일주의가 문제다 ."
"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을것을 미국이 천명해야 한다 "-> "선제공격금지" 주장으로 20년뒤 채택
" 핵폭탄 실험 암묵적으로 중단해야 한다. " 
 
 
버내버 부시, 오펜하이머, 코넌트, 번디 등 미 국무부 특별 패널로 보인 이들은 이후 호펜하이머 패널로 불리며 미국의 핵정책에 대한 마지막 간절한 입장문을 채택했다. 
 
당시 미공군의 첫번째 열핵 폭탄실험은 진행될 것이었고 자신들의 제안서가 가납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미군부의 위험한 핵정책을 저지하려고 했다. 
 
오펜하이머의 핵관련 사상의 핵심은 '솔직함'이라고 명명되었다. 
공개주의다. 
 
미국의 모든 핵정보를 소련과 공유하고 또한 미국 전체에도 공개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공할 슈퍼폭탄을 저지하고 인류공멸의 위험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의 근간이 된 사상의 제공자는 오펜하이머의 스승 닐스 보였다. 
 
그러나 끝내 보고서는 채택되지 않았고 미 정부는 민주당에서뿐 아니라 공화당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더욱더 가열차게 핵무기 경쟁으로 치달을 예정이었다. 
 
이후 저자는 번디와 멜빈 레플러등의 저술에서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역사가 증명했다고 기록했다. 
실제 소련은 경제적 부담으로 핵경쟁을 부담스러워했다. 
이 평전의 저자들이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등이 당시 소련의 지도자 말렌코프나 후르시초프를 설득하기는 힘들었겠지만 아이젠하워정부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p 745)
 
결국 군부는 히로시마 때도 그랬지만 실제 국제정치에서 그닥 필요하지도 않았을 핵무기사용과 개발을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르게 자기들 독단으로 과도하게 추진하며 세계 역사를 비틀어왔다.
여기서 나는 미군부라는 모호한 집단보다도 보든이라 루이스 스트라우스등 이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라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모습은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 
심지어 FBI가 장기간에 걸쳐 도청까지하며 은밀한 사생활을 다 털어 내린 결론조차 부정하거나 텔러가 마침내 수퍼폭탄을 만들었는데 이를 깔끔히 인정하는 오펜하이머의 멘트의 의미까지 왜곡하기도 하는 두 사람과 그 일당들. 
마치 현 야당 당대표에 대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등이 왜곡된 프레임으로 조장해놓은 기사들을 그저 믿고 어떤 반박의 말도 부정하는 특정 정치인 팬덤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물론 절대적 30%의 박정희 후계자들 추종세력들도 그러하구 말이다
 
이쯤에서 추려보는 오펜하이머 적대자들 명단
윌리엄 리스킴 보든. 
맥마혼 상원의원
헨리 스풉 잭슨 상원의원
데이비드 트레셀 그릭스 미 공군 최고수석과학자
핀레터 미 공군부장관 
 
 

32장
과학자 X

 
 
1943년 로스 앨러모스 시절 조지프 와인버그는 넬슨과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FBI가 타겟인 넬슨의 대화를 도청하다 포착한 '조'라는 사람이 오펜하이머의 제자 조지프 와인버그였다. 
FBI는 곧 다른 세명 , 로시 로마니츠, 데이비드 봄, 막스 프리드먼과 함께 이 넷을 요주의 인물로 주목했다. 
그리고 넬슨은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의 죽은 전남편의 공산당 동료였다. 
 
이 녹취록은 보리스 패시와 그로브스에게 바로 전해졌다. 
그로브스는 불법정모이며 오펜하이머에 대한 결백의 증거라고 받아들였고 보리스 패시는 오펜하이머의 불순함의 증거로 인정했다. 
이 녹취록에 대한 기소는 1950년에 이뤄졌다. 
그리고 1952년 봄 두번째 재판에서 조지프 와인버그는 다시 기소된다. 
 
오펜하이머의 적들은 와이너그의 재판과 오펜하이머를 연결시키려했지만 오펜하이머의 변호인단은 와인버그의 재판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각방으로 애를 썼다. 
 
이 과정에서 오펜하이머와 스트라우스는 서로가 적대적임을 공공연히 하게 되었다. 
조지프 와인버그 재판까지 감당하며 오펜하이머가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았고  스트라우스는 이를 해결하려는 오펜하이머의 모든 시도를 거절하고 또 차단했다. 
 
 

 
33장
정글속의 야수

 
 
※ 《정글속의 야수 》( The Beast in the Jungle ). Henry James
 
"당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신 안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희귀하고 이상하며 어쩌면 놀랄 만하고 끔찍한 일이 언젠가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고, 당신 뼛속에는 그것에 대한 예감과 확신이 있으며, 그것은 ㄷ아마도 당신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은 내가 하게 될 일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먄 하는 일이, 그것으로 내가 명성을 얻거나 존경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요. "
" 말하자면 기다려야만 하는, 대면해야만 하는, 내 인생에 갑자기 퍼져 나가는 것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지이요.  그것은 아마도 더 이상의 의식을 모조리 파괴하고 , 나 자신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마도 모든 것을 바꿔 놓고, 나의 세계의 근본을 잘라버려서 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들겠지요 "(p 760)
 
루이스 스트라우스
그는 분명 오펜하이머를 인정해서 자신이 재단이사로 있는 공동연구소 소장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이제와서 오펜하이머의 인생에 최고의 악당이 되어 오펜하이머를 공격하는 것이다. 
평전의 저자는 1953년 5월 25일을 스트라우스의 대 오펜하이머 공격 개시일로 보고 있다. 
이날 스트라우스는 FBI 후버국장의 참모임 D.M.래드를 만나 자신이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오펜하이머의 불온한 지난 날에 대해 말해줘도 되는지 FBI의 입장을 물었거든. 
스트라우스는 이후 줄기차게 오펜하이에 댛나 부정적인 언급을 계속해왔다. 여기에 더해 스트라우는 보딘이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만난다. 그는 민주당 출신임에도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이라는 강력한 의심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저격수가 되길 자청한다. 
 
보든은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임에 틀림없다는 보고서를 마침내 완성했고 이는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단하거나 새로운 증거가 들어있지도 않은 그저 억지와 아집에 가까운 의심투성이 보고서였다. 
이것의 활용을 두고 아이젠하워는 정치적 부담을 의식해 공재판에는 활용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대신에 비밀취급인가를 거두는 것에서 목표를 정했다. 
스트라우스는 교활하게도 이를 결정할 청문회에 나오지 말고 차라리 그냥 사직하는게 어떻냐고 회유를 한다. 
오펜하이머는 꼼짝없이 독안에 든 쥐가 된다. 
스트라우스는 이렇게 제안해놓고 오펜하이머의 예상 행선지에다가 도청장치를 달아 오펜하이머의 대응과정을 다 엿듣기까지 한다. 
 
 
 

34장
상황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지요?

 

 
오펜하이머는 결국 스트라우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결백하기에 청문회에서 당당히 이를 입증하기로 했다. 
그리고 로이드 개리슨을 대표변호인으로 선임하며 청문회 대응 준비에 들어간다. 
 
나는 이 장에서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야비함과 악랄함에 화가 났다. 
그는 FBI를 활용해 불법 도청을 하며 오펜하이머의 모든 대응전략을 꿰뚫고 있었다. 
청문회 위원 선정과 판사 선임에도 그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청문회전에 위원들이 FBI 도청기록을 검토하도록 하며 오펜하이머 변호인단에게 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공유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오펜하이머를 코너를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청문회는 철저히 오펜하이머에 불리한 판이었고 오펜하이머는 이 청문회를 통해 도덕적 정치적으로 모든것을 잃게 될 시나리오였다. 
 
오펜하이머의 지인들은 앞장서 나서서 오펜하이머를 도와주려하지만 그들의 시도조차 스트라우스에 발각되어 차단당한다. 예를 들어 라비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오펜하이머 보호를 요청하려는 시도 등 말이다. 
오펜하이머가 당하려는 일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이 나서 걱정해주는 장면은 짠하다. 
 
" 수년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 (p 814. 아인슈타이머의 편지 )
 
" 나를 포함해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우리 모두의 싸움을 대신하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는 것을 당신이 알았으면 합니다. 운명은 이 투쟁에서 당신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우도록 했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가 지켜 온 정신과 철학을 당신보다 더 잘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힘이 떨어지면 우리를 생각하세요. 나는 당신이 원래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길,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끝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그것은 기분 좋은 생각이었다. (p 816)
 


35장
나는 이 모든 일이 멍청한 짓이 아닐까 두렵다

 

35장은 본격 청문회 장면이 나온다.
대단히 길고 복잡하고 머리아픈 장면이다.
오펜하이머같이 똑똑하고 두뇌회전 빠른 사람에게 10여년전 나눈 수많은 대화들의 진위를 따지고 의미를 묻는 공격적인 공방이 펼쳐진다.
 
1954년 4월 12일 월요일에서 4월 16일 금요일까지 닷새동안 청문회 검사측 질의부터 시작되었다.
공격수는 연방 검사보 로저 롭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반대심문에 능한 공격적인 법정 변호사'로 명성이 있었다.
반면 오펜하이머의 대표변호사 개리스는 법정 변호사 경력이 약했다. 
닷새간 공격권을 쥔 롭은 수많은 FBI 감찰 기록을 사전에 숙지하고 있었고 여전히 FBI는 오펜하이머 진영을 도청하면서 모든 대응전략을 꿰뚫고 있는 상태였다. 
롭의 뒤에서 스트라우스는 이 청문회 세명의 위원들( 재판관급) 까지도 자기 취향으로 선임해 놓았다. 
심지어 스트라우스는 이 청문회에 대한 언론플레이까지 감행했다. 
이런 판에서 오펜하이머는 최대한 선방을 했지만 단 하나 슈발리에 건으로 집중 공격을 받았다. 
 
처음 슈발리에가 소련에의 핵 정보 공유를 제안받았을때 일언지하에 무시했던 그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속에서 먼저 이를 육군 방첩대에 신고했었다. 이때 자세히 조사를 들어온 적대적인 보리스 패시에게 거짓말 했던 것이 트집을 잡힌 것이다. 
그때 오펜하이머는 동생 프랭크를 보호하기 위해서  애먼 세 사람 어쩌구 떠벌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검사측 증인으로 나온 레슬리 그로브스. 
그는 오펜하이머를 믿었고 보호하고 싶었지만 본의아니게 결정적으로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말았다. 
너무 오래전 기억에 대한 추궁이 있었기도 했지만 스트라우스가 그로브스를 몰아부쳤던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비밀취급인가 처분 청문회는 이렇듯 청문회장에 들어선 모든 사람의 인격과 인생을 드러내며 발가벗기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법정에 서면 절대 안될 사람이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죄를 짓고 살지 말아야지
나는 내가 조금전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못하는 사람이다.
상대방하고 말싸움 하듯 하는 이 심문이라는 거?
아이구!
나는 도대체 상대방(검사나 변호사) 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도 못할 거다.
이해할려는 머리보다 공격당하거나 모욕당하고 있다는 감정적 반응이 더 크게 나올거다.
그러면 나는 고등어대가리가 되나서
흥분하거거 문장 한마디라도 혹여 긍정과 이해의 어조가 보이는 것을 냅다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그것이 혹시 검사측에서 나를 낚으려고 던지는 미끼라도 말이지.
 
오펜하이머는 기본적으로 감히 해서는 안될 싸움을 벌인 사람이었다.
온 세상이 소련과의 경쟁, 반공 이데올로기에 휩싸여간 세상에서 세계최강의 무기를 소유할 수 있다는 유아적 치기가 가득한 미국에서 그 무기가 아주 나쁜 무기이며, 소련과 싸우지 말고 협력하자고 말하는  놀라운 주장을 펼쳤던 오펜하이머는 확실히 프로메테우스같이 미움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세상이 감당치못할 위대한 선지자였다.

그러니 그런 오펜하이머를옭아매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한 온통 덫같은 청문회장에서 홀로 증인석이라는 심판대 위에 올라선 오펜하이머는 딱 본디오 빌라도 앞에선 예수같다 ㅜ
그리고 여전히 돌을 던지는 군중 속에서 홀로 십자가 지고 가는 구세주 같다. ㅠ
 
저자는 오펜하이머의 당시 모습을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에서 비슷한 원형을 찾아냈다. 
' 그것은 금욕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이었다. 이는 아주 오래전 캠프장 얼음 창고에 갇힌 어린 소년이 자신의 상황을 조용히 받아들였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p 857)
 
 
 

36장
히스테리의 징후

 

반격의 시간

 

주말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한주. 
이제부터는 변호인 심문(?, 질의!) 시간이다. 
오펜하이머를 편에 선 증인들 명단이 감동이다. 
한스 베테, 조지 케넌, 존 매클로이, 고든 딘, 바네바 부시, 그리그 제임스 코넌트 등이었다. (p 859)
존 렌스데일과 라비 , 그리고 릴리엔탈도 있다. 
모두 오펜하이머의 인생 여정에서 오펜하이머와 친분을 다져온 오펜하이머 인생의 소중한 사람들이다. 
'과학계, 정계, 산업계에서 저명한 인물들'이라고 한다. (p 859)
 
나는 지난 35장부터 여기 청문회에 검사측 , 변호인측 그렇게 두번이나 증인석에 앉았던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에 대해 감탄했다. 키티는 증인심문을 받을 동안 당황하지 않고 냉철하게 답변을 잘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공격에는 곧 자신의 공산당 활동과 전남편의 이름도 언급될 터 그러함에도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검사에게 말리지도 않았더랬다. 
 
오펜하이머의 증인들 중에 존 매클로이란 사람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하길 이 청문회가 마치 뉴턴이나 갈릴레오가 위험인물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 859)
존 매클로이의 생각이 옳았다. 
감히 뉴턴이나 갈릴레오같은 과학사의 중요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지 그만큼의 똑똑한 머리를 가진 사람을  판정하려 들었으니 스트라우스 일당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스트라우스는 롭을 통해 나중에 검찰측 증인명단도 변호사와 공유하지 않도록 했다. 
정말이지 비열하고 야비한 술책들 투성이다. 
이후 37장에서 이 청문회의 재판관 급이자 이 청문회 결과를 최종 승인할, 자신이 소속 위원으로 있는 원자력 위원회 위원들을 어떻게 '매수'했는지 과정까지 알면  스트라우스에게 역사적 심판이라는 모호한 표현도 무척 관대해 보일 지경이다. 
저자는 그래서 이 청문회를 인민재판이라고까지 불렀다. 
36장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이 역사적 청문회를 그렇게 불렀다. 
당시 오펜하이머와 개리슨 변호인단이 보고 느꼈던 것 이상으로 오펜하이어메엑 불리하게 조성된 청문회(재판) 의 책임은
당연 루이스 스트라우스이지만 이 청문회의 재판장 격이었던 위원회의 책임도 명백하다. 
' 그레이 위원회 청문회는 명백히 불공평했고 터무니없는 불법 행위였다. 청문회 절차를 추진했던 주요 인물은 루이스 스트라우스였다. 하지만 고든 그레이는 위원장으로서 청문회가 공평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는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1) 그는 롭의 불법적인 전술을 통제하여 청문회를 공펴아게 진행할 수 있었지만 롭이 절차를 주돌하도록내러별 두었다. 
2) 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레이는 롭이 단독으로 위원들을 만나 FBI 파일을 검토할 수있도록 허가했는데. 이것은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1950년 '비밀취급인가 절차'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3) 그는 개리슨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롭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개리슨이  FBI자료를 못보게 했다. )
4)그는 롭이 개리슨에게 증인 명단의 공개를 거부했던 것을 묵인했다. 
5)그는 피고측에 로런스의 서면 증언을 보여 주지 않았다. 
6) 그는 개리슨에게 비밀취급인가를 내주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않았다. 
결국 그레이 위원회는 수석판사가 수석검사 역할을 동시에 맡은 전형적인 인민재판(kangaroo court)이라고 할 수 있다'(p 881)
 

37장
이 나라의 오명

 
 
파국의 후폭풍
 
청문회 결과는 2:1로 오펜하이머의 비밀취급인가를 거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유죄평결을 받은 셈이다. 
이어서 스트라우스가 위원장으로 있는 원자력 위원회가 이 평결을 추인하는 일이 남았다. 
위원회 위원의 수는 총 7명이다. 
스트라우스는 여기서 단 한명을 제외하고 거의 매수하듯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심지어 원래 오펜하이머의 무죄를 주장하던 위원 유진 주커트란 사람이 나중에 법률 사무소를 차릴때 모든 사건수임을 그아주기로 약속을 하며 주커트의 입장을 바꿔놓았다. 
 
그레이 청문회에서는 에번스가 오펜하이머의 무죄를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냈다 .
 
"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오펜하이머 박사의 비밀 취급 인가를 승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오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의 주요 과학자들이 그의 증인으로 나섰고 , 그들은 그를 지지하고 있다. "(p 889. 워드 에번스)
 
그리고 원자력 위원회에서는 헨리 드울프 스미스만이 오펜하이머의 비밀취급인가 회수를 반대했다. 
스미스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오펜하이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스미스의 책략을 반대했고 오펜하이머를 보호하기 위해 몇날 며칠 1미터가 넘는 보고서 더미 속에서 의견서를 정리하느라 밤을 샜다. 
 
당장 청문회 결과부터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청문회결과를 비판하며 오펜하이머를 두둔하는 글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방송인 에릭 세버레이드의 논편이 재치있고 인상적이다. 
" 오펜하이머는 정부의 기밀문서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고, 정부는 아마도 오펜하이머의 머리에 든 비밀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 (P898)
조와 스튜어트 앨솝 형제는 이 사건을 드레퓌스 사건에 비교하여 " 우리는 고발한다" 라는 장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저자는 청문회 결과가 오펜하이머와 미국사회에 당시 던진 파문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내린다. 
1. '과학자 공동체는 수년 동안이나 큰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
2. 오펜하이머가 끌어내려지자 과학자들은 앞으로는 (대중 철학자로서의 정당성을 버리고 ) 좁은 과학 문제의 전문가로서만 국가에 봉사 할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p 901)
3. 에드워드 텔러, 루이스 스트라우스, 그리고 어니스트 로런스 와 같은 과학자들과 행정가들은 그들의 군사 중심주의와 반공주의로 미국 과학자들과 미국 과학 기관들을 미국의 군사적 이해 관계에 거의 완벽하게 복속시켰다. (p902)
4. 오펜하이머의 패배는 또한 미국 진보주의의 패배였다. (p 902) 
' 꼭 첩보 활동이 아니더라도 ,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더라도 미국의 핵무기 의존이라는 우너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954년 오펜하이머에 대한 보안 청문회는 냉전 초기에 미국의 공공 영역이 급속이 좁아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p 903) 
 
나는 정말이지 이 모든 판을 망가뜨린 주범이 루이스 스트라우스 한 사람의 집요한 아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관건이다. 
어떤 난 놈 하나가 자신의 모든 역량과 권한을 하나에 몰빵해서 상황을 망쳐버리기로 작정하면 
세상은 이를 막을 수가 없다는 현실이다 ㅠ
 
 

38장
나는 아직도 손에 묻은 뜨거운 피를 느낄 수 있다. 

결국 그의 정적들은 원하는 대로 그를 파괴하고 말았다. 

 
 

청문회 이후 달라진 오펜하이머의 위상
 
오펜하이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애써 무시하는 것으로 견뎌내려 한다. 
그러나 타격을 받은 티가 겉으로도 역력했다. 
오펜하이머는 최대한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오펜하이머는 비록 정부 자문역에서 해고되었지만 고등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을 유지할 수있었다. 
스트라우스는 고등연구소 이사회에서도 영향력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고등연구소의 동료 교수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그를 버티게 했다. 
 
오펜하이머 가족들은 세인트 존 섬에서 휴양을 하며 삶의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언론 인터뷰를 많이 했다. 
 
38장에선 오펜하이머를 곤경에 빠뜨려놓고도 여전히 망상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FBI와 그 동조세력들의 추태가 나온다. 
' 계획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먼저 영국을 고 갈 것이고,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동한 후 , 프랑스에서 소련의 손아귀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p 912)라는 보고서를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오펜하이머 가족을 철의 장막 저편으로 유괴하려는 "오펜하이머 작전"을 세우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p 912)
역사의 악당들은 항상 자기들 안경으로 세상과 의인을 보는것 같다. 
 
오펜하이머 사태에 대한 해외 지성들의 반응
● 이와 같은 환경에서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 p 913 「뉴 스테이트맨 앤드 네이션 The New Statesman and Nation 」. 크로스먼 R.H.Crossman . )
 
● 문제는 그가 고발인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애초부터 그들에게 '내가 바로 원자폭탄이오 ( Je suis la boome atomique!) '라고 말해 줬어야 했어요 !
자신이 원자폭탄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어야 했습니다 .
그는 과학자이지 밀고자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p 913. 앙드레 말로 )
 
● 아리스토텔레스식 드라마, 셰익스피어에 못지 않은 풍부함과 다양성, 그리고 「전쟁과 평화」보다 훨씬 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 보다 복잡한 줄거리 
(p 914.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오펜하이머 청문회에 대한 평
 
반면에 오펜하이머의 적대자들은 오펜하이머의 대학강연을 막으려고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윌리엄 제임스 강연을 제안받는다. 이 대학 학장  맥조지 번디가 이를 지원했다. 
 
오펜하이머와 존 내시의 인연도 소개된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도 오펜하이머가 소장으로 있는 고등연구소를 다녀갔다. 
 
'시간이 갈수록 오펜하이머는 점점 더 국민적인 명사로 떠올랐다. '(p 926)
 
 

39장
그곳은 정말로 이상향 같았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세인트 존에서의 삶
 
세인트 존 섬은 버진 제도 안의 작은 섬이다.  
오펜하이머는 이곳을 바다판 '페로 칼리엔테'로 만들려고 했다. 
그곳에서 오펜하이머 부부는 이웃집 기부니 부부와 악연을 쌓았다. 
그러나 대다수 선에서 만난 이들은 좋은 인연이 되어 오펜하이머의 은둔생활을 행복하게 했다. 
지단 부부, 라임주스 리처드 , 시스 프랭크, 사브라 에릭, 잉가 힐러비타 등이 그들이다. 
 
오펜하이머와 섬 지인의 재미있는 대화 한 편.
 
세이트존 친구 : 오펜하이머, 달에 가고 싶어요?
오펜하이머      : 글쎄요. 그곳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몇 명 있기는 한데 ....
 
'세인트 존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자기내부의 악마들로부터 적당한 도피처를 발견했다. (p942)
 
 

40장.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다. 

 

 
 
오펜하이머의 마지막; 명예의 회복과 육신의 죽음
 
1962년 4월 케네디 대통령과 오펜하이머의 만남이 있었다. 
이번에는  맥조지 번디가 케네디 정부의 국가안보 자문역을 맡고 있어서 막후 지원을 할 수 있었다. 
1963년에 오펜하이머는 엔리코 페르미상을 수상했는데 애초에 케네디 대통령 집권기에 계획된 일이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수상식을 코앞에 앞두고 암살됨으로써 페르미상 수상이 물건너갈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 시인처럼 글을 쓰고 선지자처럼 말하는 과학자 (p 945. 에릭 세버레이드. CBS)
 
페르미상 수상식에는 웃픈 장면이 노출되었다. 오펜하이머와 에드워드 텔러(이 상의 전해 수상자 ) 가 악수를 하는 옆에서 키티가 텔러에 대한 원한을 감추지 않는 모습이다. 
 
40장의 짜릿한 장면 하나!
 1959년 아이젠하워가 스트라우스를 상무부 장관에 천거하자 스트라우스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여기서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의 스트라우스 행적이 도마위에 올랐고 결국 스트라우스는 장관에 오르지 못하고 만다. 
이때도 결정적으로 활약한 맥조지 번디. 
 
"재미있는 쇼가 벌어지고 있음. 이렇게 원수를 갚게 되다니. " 
" 그의 몸부림과 고통을 즐기시오. 좋은 시간 보내길.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텐데."(이상 p 948. 버니스 브로드)
 
오펜하이머와 미디어
 
 「J.로버트 오펜하이머 사건에 대해 ( In the Matter of J.Robert Oppenheimet)」( 1964.헤이나르 커프하르트.)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성황리에 공연
 
 「원자폭탄 사용결정 The Descision to Use  the Atomic Bomb」( NBC.1965)
 「오펜하이머 사건-재판정에 선 보안 ( The Oppenheimer Case. Security on Trial)」( vlfflq tmxjs. 1969)
 
1965년 가을 오펜하이머 후두암 판정을 받다. 
그해 봄부터 고등연구소 소장직 사임을 준비하고 있던 그다. 
오펜하이머가 떠나기 전날 그를 마지막으로 본 이는 루이스 피셔 (저널리스트 )와 퍼거슨 ( 오릇앨러모스 동료 )
1967년 2월 18일 
암 발병후 만 4년을 못채우고 끝내 후두암에 무너진 한시대의 영웅
 
풀 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추모사가 인상깊다. 
" 이 특별한 천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무슨 일을 (무슨 짓을 ) 했는지도 기억합시다. "(p965)
 
그리고 프린스턴 장례식에 이어 미 물리학회 특별 세션에서도 오펜하이머 추모식이 다시 한번 거행되었다. 
라비 서버, 바이스코프 등의 발언집은 이후 책으로도 출간되었다고 한다. 
 
 

에필로그
이 세상에 로버트는 단 한명 뿐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사후 오펜하이머의 남든 가족들 근황.
 
키티가 오펜하이어의 절친 서버와 같이 산다니!!!!!
주석을 찾아보니 서버의 아내도 오펜하이머가 죽은 해에 자살을 했다고 한다. 
서버는 키티의 마지막을 지켜볼수 있었다. 
키티와 세계일주를 하려던 중 키티는 색전증으로 사망한다. 
서버는 오펜하이머의 딸 토니도 챙겼다. 
토니도 아버지처럼 언어에 재능이 많았지만 스스로를 믿지 못했고 많이 방황했나보다. 
아버지 오펜하이머가 죽은지 10년후에 오펜하이머와의 추억이 깃든 오두막집에서 목을 맸다고 한다. 
 
아들 피터 오펜하이머는 아버지의 유명세를 피해 조용히 살았다. 
아버지가 사랑한 뉴멕시코의 페로 칼리엔테 산장에서 샌타페이 핵폐기물의 위험을 알리는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한다. 
나중 저자후기에 보는 그는 이 책을 쓴 작가 마틴 셔윈과도 만난다. 
 
오펜하이머의 동생 프랭크이 후일담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형이 그렇게 동생을 보호하려 애썼건만 , 그렇게 좋아하던 물리학 교수직에서 파면된 후로 프랭크는 단호히 집안의 농장으로 가 농부가 되었다. 
10년만인 1959년 그는 다행히 복권되었고 콜로라도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익스폴러라토리움 (Exploratorium)」이라는 체험형 과학 박물관을 설립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프래크가 여기 익스폴라토리움에 설립취지로써 한 말이 감동적이다. 
 
●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면 사회적 , 정치적 세계 역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면 모두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p 968. 프랭크 오펜하이머 ) 
 
세인트 섬의 호크네스트 만에 가면 지금은 오펜하이머의 오두막이 사라지고 없다. 
대신에 사람들은 그 해변을 오펜하이머 해변이라고부른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1923년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의 100억불 대작 영화의 주인공으로 부활할 것이다. 
 


 
 
 
 이 긴 책에서 오타발견! ㅋ


 

 
오펜하이머는 지금 내곁에
 
한달간 이 두꺼운 책을 붙들고 살았더니 꿈에서도 오펜하이머 꿈을 꿀 지경이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가 내 가까운 지인같이 여겨진다.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어떠한 사람이냐고?
대단히 섬세한 시인같으면서 대단히 똑똑한 리더같다!
사실 이런 류의 사람을 주위에서 본적이 없다!
그 온유한 성품에서 나오는 카리스라마라면 우리 목사님같다가도.
접근하기 어려운 예술가 느낌에서라면 예술쪽은 아니지만 익스트림 스포츠 매니아 한명이 그렇게 탁월하게 저 높은 경지에 올라가 있어서 나는 그저 우러르느라 바쁘다 ㅎ
그러니까 이 양쪽이 합쳐져 있는 이렇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물은 당최.......
 
더욱 감당이 안되는 것은 그의 높은 지성
네! 말그대로 지성이다!
대단한 물리학자이고 언어 천재여서 아는게 많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남들이 오른쪽으로 가기 바쁠때 왼쪽도 봐야 한다면서 냉전시대에 군축을 주장한 놀라운 선지자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렇게 당시 이스라엘 국민들의 몰매를 맞았다. 
국민의 대세를 거스르는 예언을 해대서 말이지. 
오펜하이머 또한 그가 원자폭탄을 만들어냈다는 것보다 당시의 기조를 뛰어 넘은 영적 혜안을 보여준 게 놀랍다. 
그러니까 과학자를 초월하여 철학자이고 예언가였던거나 다름없다는 거다. 
그러니 닐스 보어와 그렇게 결이 맡았는가보다. 
닐스 보어는 아예 철학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다. 
철학관련 책도 썼겠지. 
 
그렇다고 원자폭탄 만들어낸 일도 정말정말 놀라운 일이다!
원자폭탄은 누구 한사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게 아니다. 
모든 과학자들의 머리를 죄다 열어보고 꺼내서 활용할 수 있는 지적 영도자가 필요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를 지휘하는 당시 군 지도부와의 소통도 중요했다. 
오펜하이머는 그 모든걸 다해냈단 말이다!
독일에 하이젠베르크도 만만치않은 천재 물리학자였지만 그에게는 오펜하이머의 영성과 리더쉽 그리고 카리스마가 없었다. 
그러니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는 것은 천만번 당연한것 같다. 
 
 
평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셰익스피어까지 아우르는 그 이상의 스토리
 
장장 25년에 걸쳐 쓴 평전이라고 한다. 
이 평전의 놀라움은 첫째 평전이 제대로 평전다웠다는 것!
평전을 보통 전기나 위인전으로 이해한다면 오늘날 오펜하이머 평전에서 오펜하이머는 너무도 많은 약점과 비난거리들이 들어있다. 
저자는 그런 오펜하이머의 부족한 모습들을 모두 담았다. 
그러함에도 전혀 오펜하이머에 대해 실망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없는 거니까!
그런 속에서 오펜하이머가 겪어온 세월과 그 업적들의 가치가 더 빛나는 거다!
 
둘째 평전 이상으로 완벽한 드라마
 
시는 인생의 모방이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그말은 그만큼 짜임새 있는 구조안에 우리네 인생을 완결되게 담아야 한다는 원리를 말한 거다. 
오펜하이머의 평전은 평범하게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 모습을 시간순서대로 훑아간다. 
이는 마치 발단에서 캐릭터의 성격과 주제 그리고 결말을 위한 구조를 다 깔아두는 과정과도 같았다. 
어린 오펜하이머가 친구들에게 억울하게 갇혀 고생하고도 아무말 안한 일들, 결정적인 순간마다 상황을 망치는 말실수를 하는 일들 , 오펜하이머가 인도 브라만의 시를 좋아하는 것등이 이후 오펜하이머가 당한 인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소환되어 장면의 이해를 돕게 하는 거다!
 
발단만 있나?
전개 위기 절정 결말 다 갖췄다!
오펜하이머 평전의 절정은 누가 뭐래도 오펜하이머가 루이스 스트라우스에 의해 원자력 위원회 비밀취급인가 청문회였다. 
그렇다!
구조만 3단 (+5단)으로 갖춘 것이 아니라 히어로와 안티히어로 , 조력캐릭터도 있다.
루이스 스트라우스.
오펜하이머 인생에 이런 극적인 악당이 등장하다니!
우리가 살면서 적대자나 웬수 만날 일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루이스 스트라우스와 만남에서부터 물과 기름같은 존재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것을 운명이라고 하지 ) 오펜하이머는 루이스 스트라우스와 연을 이어가는데 그것이 곧 악연으로 발전되어간 것이지.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제대로 망가뜨렸다. 
단순히 그저 잠깐 강력한 어퍼컷 한방 날린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집요하게 덫을 놓고 함정을 파고 몰이꾼을 세워 몰아대면서 오펜하이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이고야 내인생에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노린다면 나는 감당할 수있을까?
영화속에서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얼마나 악랄한 악당으로 부활할까?
 
셋째, 평전이면서 한시대의 역사서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전에 사전 예습차 만난 책이다. 
너무 길었지만 그만큼의 값어치를 했다. 
나도 나름 구글링으로 맨하탄 프로젝트며 오펜하이머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그걸로는 오펜하이머가 살았던 시대가 통시적으로 정리가 안되었다는 거다. 
오펜하이머와 같은 시대를 산다는 느낌으로 출생전부터 그의 집을 다 들어가고 학교도 가고 그가 만난 사람들 함께 만나고 하다보니 맨하탄 프로젝트의 의미와 거기 함께해온 많은 오펜하이머 인생의 주조연들이 그제서야 머리에 들어온다. 
당장에 루스벨트와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순으로 미 역대 대통령 순서가 입력이 되버렸다 ㅎ(그 다음 대통령도 나오는데 이름을 까묵었다 ㅎ)
그리고 냉전이 어떤 식으로 찾아왔고 데탕트가 어떤 분위기에서 환영받는 사건이었는지 감이 좀 잡혔다. 
나는 한편 영화<<추억 (The way we were >> 을 아직 보고 있는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될 것같다. 
 
사실 머리속에 정리가 안되어서 한번은 더보고 싶은 책이긴 한데 
정말 넘 힘들었고 갈길이 바빠 여기서 책을 떠나 보낸다. 
이 위대한 책그리고위대한 인물 을 만나게 해준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이 책 다 읽었다는 영광을 바친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