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2023. 4. 26. 14:17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남자 숙종 그리고 그의 신하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까지 밖에 못욌다 ㅋ
어찌되었건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 경종과 최무수리의 아들 영조의 아비되시니 병자호란이 끝나고 한참 뒤고
영정조 조선마지막 부흥기의 직전을 살았던 임금.
이 시기 신하들은 그닥 유명한 사람들이 없다.
워낙에 장희빈 + 남인,  인현왕후 + 소론의 공식이 강했던 때라.

그러나 있었다더라!!!!!!!!!!!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며 친국장에서 숙종에 대고 따닥따박 따지고 든 위대한 충신.


왕에 의해 죽었지만 민중에 의해 되살아난 신하

 


장희빈 남편의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끝내 유배가는 중에 생을 다한 명신의 이야기는 그리하야 민간에 널리 그의 이름을 딴 위대한 국문구전소설로 회자되었다네요 ㄷㄷㄷ

국문소설 박태보전은 필사본도 있고 , 제목이 다른 활자본도 있고 이본도 되게 많다
이 정도로 버전이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소위 만고충신 박태보의 죽음을 무릅쓴 절개와 기상을 높이 평가하며 인기가 많았다는 뜻이겠지 .
정작 소설에는 박태보의 삶이 잘 드러나 있지않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우리 조선의 충실한 기록문화 속에서 박태보의 행적을 찾아냈다.
관련 논문은 그 중에 박태보의 두 가지 결정적 행보에 관련해 쓰여진 자료다.
박태보가 박세당 아들이었다니 ㄷㄷㄷ

 숙종의 박태보


조선시대 각 임금의 시대를 대표하는 명신 혹은 간신들이 있다.
태조에겐 정도전,
세종에겐 이후 문종과 단종을 거쳐 조선시대 전기의 위인열전이 따로 없다 .
황희, 맹사성,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최해산 ㄷㄷㄷ

연산군은 간신 유자광, 임사홍이 짝으로 연결된다.
중종은 조광조

그리고 선조같은 혼군!昏君 때에는 그 유명한 오성과 한음(이항복과 이덕형) 에 이이, 이순신, 유성용,이황, 이원익.....

이제 영조에 이르기 전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숙종은 충신? 명신! 박태보를 만난다.

정제 박태보


박태보는 박세당의 아들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조선 유학의 새로운 흐름 얘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이름이다.
(조선시대 중후기 인물들은 이름들이 비슷하기도해서 내가 헤깔린 걸 수도 있다.)
아버지처럼 이 아들도 장원급제로 출사를 한다.

박태보와 숙종은 악연이 있다.
박태보와 관련된 중요 일화 세가지는 모두 박태보의 성격을 말해주면서 거기에 숙종이 두번이나연관된다.

첫번째 일화는 박태보가 중앙정계 그 중에서도 그 대단하다는 옥당(홍문관)  에서 활약하던 시기에 벌어진 일.
박태보가 임금이 너무 게으른 주제에 성질머리가 나빠서 신하노릇 못하겠다고 상소문을 올린 것 ㅎ
이 일로 짤린 것도 모자라 영원히  관직을 받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는데 조정 대신들이 나서서 직언을 하는 신하를 탄압해선 안된다는 주청들로 복직되었다.
대신에 때문에 박태보는 중앙정계에 들어가지못하고 지방관직을 오래 맡게된다.

두번째 일화는 그가 이천이란 자그마한 고을의 현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참 조정에서는 양반이 자기 노비를 첩으로 삼아 낳은 자식(자기비첩소생) 의 신분에 대한 논의가 치열했다.
물론 경국대전이란 헌법에는 어머니가 노비이니 자식도 당연히 노비였지만 문제는 양반가의 핏줄이나 일정 절차를 거쳐 궁극에는 양민신분을 갖도록 규정해놓았었다.문제는 촌수가 5촌이상으로 벌어지는 관계( 당숙조카관계) 에 있었다.
4촌 이내에선 종 신분일지라도 차마 종으로 부릴 수없는 '인지상정'  개념을 법에 담아놓은 게 경국대전헌법의 입법취지.
그러나 자기 할아버지의 노비첩 자식은 5촌이 넘어가니까 종으로 부려도 되는 거 아니냐고 후레자식들이 법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잇속을 챙기려했다는 거다.
이 문제로 숙종 임금 앞에서 영의정 이하 조정 대신들이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 토론 결과를  새로운 법의 시행령으로 삼았다.
「갑인수교」라고 한다.

그런데 한양서 먼 시골 구석 이천 현감이란 자가 갑인수교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고 조정에 문제제기를 던진다.
그리고 그의 판결은 갑인수교를 폐지하고 다시 경국대전 법령의 취지를 살리는 쪽으로 재정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ㄷㄷㄷ

세번째 일화는 그의 최후의 기록이며 숙종과의 악연의 끝을 보여준다.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후궁 장희빈을 정궁의 자리에 앉히려는 숙종.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중심에 박태보가 있었다.
숙종은 자신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상대의 주장을 그저 편협한 당략적 행위로 몰아가기위해 직접 고문을 가한다.
말그대로 한밤중에 날벼락을 벌인 임금.
그러나 박태보는 비명한마디 지르지 않고 또박또박 숙종이 제시하는 혐의를 반박한다.
사관은 이 상황을 상세히 기록에 남겼다.
숙종의 정말 쫌스러운 모습 하나.
내가 너 저번에 나에 대해 악담을 한 상소문 올렸을 때부터 알아봤어!
뭐 그런 뉘앙스로 친국을 시작했다고 한다

박태보가 죽음을 각오하고 친국장에서 숙종을 논박하는 모든 모습은 소론이었던 박태보의 정적인 남인 정치인들까지 감화시켰다고 한다.

박태보는 끝내 숙종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다음날 바로 유배형에 처해지는데 유배가는 도중 한강을건너기도 전에 죽고만다.
그가 형틀에 매여 유배지로 떠나는 모습을 도성의 백성들이 모여서서 울며 따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박태보전의 주인공으로 부활한다.

조선의 법과 정치 그리고 기록의 힘


나는 박태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조선의 법, 정치체계, 기록 유산 등의 위대함을 보게된다


조선 최고 법령의 위엄을 가르쳐주마


우선 법이야기
조선 최종 헌법 경국대전에 이르기까지
「조선경국전」「원육전」「속육전」「경제육전」「신찬경제육전」등이 국가적 과업으로 온갖 정성을 들여 편찬되어었다 .

편찬원칙에는  만세불역 , 성헌존중의 개념들이 생겨났는데 이게 그닥 완벽히 지켜지진 않았다고 한다.
영조와 정조랑 그리고 대원군도 개찬을 계속 해왔다니까.
어찌되었건  헌법같은 위치의 큰 법이 있었다.
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조선시대에 말이다!!!!!

그리고 그 법을 체계적으로 지키려 했다.
우리가 사회시간에 배운 법의 4종류처럼!
헌법-> 법률-> 명령-> 규칙

헌법이랑 법률은 국민의 대표자 국회의원만이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명령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나온 것이니까 입법부가 상위법 정신 안에서 만드는 것.

(그런데 한동훈 현 법무장관은 2022년 입법부에서 개정한 법률들을 법무부 내 시행령을 바꾸어 안들어 처먹고 있다는....
조상님보다 못한 것 같으니라고)

조선에도 이런 시행령이란 게 있다.
오늘 만난 갑인수교가 그런 거다

중앙정계 대신들이 정한 시행령을 지방 말단 수령이 반대하고 판결하다.
오늘날로 치면 국무위원들의 시행령에 반발하고 지방 군수가 위헌제청을 한 셈이다 ㄷㄷㄷ
그리고 그 갑인수교는 위헌판결에, 박태보의 실제판결은 합헌 판정을 받는다!

넘 매력적인 걸♥


오직 명분, 명분 !
조선의 명분정치


특히나 숙종이 박태보를 친국하는 것에서 오히려 조선 정치체제의 진보성을 읽게 된다.
왕은 무조건 왕비를 갈아치우지 못한다.
대신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는 왕.
왕도 안다. 어떤 도덕적, 법률적 명분이 없다는 것을.
때문에 일단의 신하들이 벌이는  조직적 반발
을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편협한 당쟁으로 몰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는 모습.

숙종은 그래서 친국을 벌이며 신하와 직접 싸운다.
그리고 신하에게 자백을 강요한다.
신하들의 반대가 오히려 도덕적이지 못하고 명분이 없는 것임을 요구하는 것.

그만큼 왕은 자신의 행위에 명분과 정당성을 불어넣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왕이나 각 붕당의 정치세력이 그저 이권과 당파적 정략으로만 움직인것이 아니었던 조선시대 정치사의 일면이 새롭게 돋보인다.
우리네  보통의 관념에서는 그저 조선왕조의 모든 기득권들이 왕을 농락하거나 혹은 왕이 무작정 신하위에 군림하려 들었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이는 자학적이고 또 무식한 편견이다.

물론 잔인한 고문을 가하고 왕의 권위로 위압적으로 구는 행태는 결코 비호받을 수 없다.
사람 하는 일이 늘 그렇듯 오만한 안티와 겁쟁이 조연과 용감한 주인공이 어우러지는 장면이 조선왕조 숙종실록 20권 15년에 일어났더란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아니 아니
내 말을 제대로 알리라



박태보와 숙종의 친국 장면은 왕을 상시 따라다니는 사관에 의해 다 기록되었다.
그래도 박태보는 유배가는 자식을 보러온 늙은 아버지의 귀에 직접 당시의 모든 상황을 넣어주었다.

아버지 박세당은 먼저 간 아들이 쓴 모든 글들을 모아 아들의 이름으로 문집을 만들어주었다.「정재집」(1892년)

이 「정재집」에는 「기사록」,「단송안」(박태보.1684)
등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들도 들어있다.

「단송안
」은 조선시대 원님재판 현황을 잘 보여주는 재판기록물 「결송입안」의 하나다.
박태보 본인도 의미있는 판결이라 생각해 기록한 것인데 판결문의 내용이 여러모로 뜻깊고 탁월하다.

이렇듯 한사람의 행적을 알아보는 여정에 무수한 사료가 보장되어 있으니 과연 조선은 문의 나라다.
온통 책과 시, 각종 기록들이 넘쳐난다.

 

1.기사환국 : 숙종 15년(1689) 인현황후 폐비 등의 이유로 서인세력 100여명의 숙청

- 기사진신소 : 오두인, 이세화, 박태보 등 서인  80인이 주축이 되어 인현왕후 폐위 철회 상소

2. 조선 사족들의 군주관 변천
명분론 (의합론) -> 출처론-> 격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