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살아남은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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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도시
김인정(전 광주MBC 기자)
어린 시절, 우리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이런 노래를 가르쳤다. 교과서에 없는 노래였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 개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가사가 이상했다. 다른 동요와는 달랐다. 노래는 좋았다. 가슴이 잘렸다고, 왜 쏘았냐고, 왜 찔렀냐고, 아이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다 함께 노래했다. 선생님은 노래가 태어난 역사에 대해서도 알려줬지만, 설명보다 힘 있는 가사만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이 노래를 이따금 함께 흥얼거렸다. 꽃잎처럼 뿌려진 피나, 두부처럼 잘려나간 가슴이라니 끔찍이도 생생해서 그 부분만 반복해서 부를 때도 있었다. 모두가 그 노래를 뜻 없이 자주 불렀기에 어떤 아이는 제 젖가슴이 도려져나가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이 노래가 우리들이 태어난 도시에서 일어난 실제 역사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기 전이었다. 대신 우리는 이런 걸 알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다리 한쪽이 없다는 것 , 맛있는 떡볶이를 보온 도시락에 가득 싸주던 반장 엄마가 5 .18 유공자 라는 것, 다른 대도시에서 전학생이 오면 어쩐지 약간 주눅이 들 정도로 우리의 옷과 집이 전체적으로 좀 남루하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고향이 가난하다는 것. 우리의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 심지어 교사들까지 투표장에서 누굴 꼭 찍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선거할 때마다 자주 한다는 것. 그런 사실을 서로 연결하진 못했다. 우리는 가끔 그런 일들을 그저 보고 들었고, 지저분한 공터와 먼지투성이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던지고, 고무줄을 하며 뛰어노느라 금세 잊고 말았다. 입에 익은 노랫말만 오래오래 남아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기자가 되어 고향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어린 시절의 파편들을 꿰어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부르던 노랫말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것을.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어째서 꽤 오랫동안 비밀이어야 했는지를. 계엄군이 누구의 명령을 받고 광주 시민들에게 총을 쏘았는지가 왜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보게 된 사진들은 어린 시절 배운, 바로 그 노랫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니까,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가사는 운율에 맞춰 꾸며낸 시어가 아니었다. 선율에 숨겨 겨우 구전된 증언으로 봐야 했다. 그 노랫말의 정확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이길 단어를 찾기도 어려워 한참 헤매게 됐다. 주저하고 주저하다, 기사에는 ‘계엄군의 폭력에 짓이겨져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라는 표현만 겨우 남겼다. 그러나 사진에 기록된 참상은, 그런 헐겁게 밋밋한 표현 바깥으로 다 비어져 나오고 흘러나와 버릴 나올 정도로 끔찍했다. 그 사진들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를 두고, 기사를 쓸 때 망설였듯이 지금도 망설인다. 사람이 사람에게 행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살과 뼈가 짓이겨져 있었다. 눈알, 코, 치아, 모든 것이 제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의 형체가 남아있지 않은 시신들이었다. 그 사진들은 계엄군에게 희생된 시신이 안치됐던 광주기독병원에서 기록용으로 찍힌 것이라 했다. 한 목사가 바닥에 흐른 피에 계속 미끄러지며 그 사진들을 다급히 찍었다고 했다.
상처는 39년 전 찍힌 낡은 필름 속에만 멈추어 있지 않다. 5월의 희생자들이 잠들어있는 망월동의 무덤 언저리에만 고여있지도 않는다. 이 도시의 낡은 건물 구석구석에, 분수대에, 광장에, 그 일이 일어났던 땅에, 그들의 가족이 사는 집 곳곳에, 5월이면 빈번해지는 제사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광주의 심장부에 위치한 전일빌딩 건물에서는 최근까지도 총탄 흔적이 발견된다. 5.18 단체 사무실 앞에선 양쪽 볼이 깊게 팬 채 광대뼈가 두드러진 중년 남성들이 목발을 짚고 한쪽만 남은 다리를 질질 끌며 두리번대는 모습이 보인다. 당시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도 못한 여성들이 미쳐버렸다는,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가족과 이웃들의 입에서 입으로 지금도 전해진다. 시신들이 암매장된 곳을 안다는 증언도 되풀이된다. 이런 이야기들은 끝도 없다. 멈추지도 않는다. 5월만 되면 들쑤셔대는 언론사들 때문에 죽겠다면서도 매해 울면서 증언한다. 증언을 이어나가자, 진실을 밝히자는 오래된 구호들은 이 도시 안에서만큼은, 낡은 적이 없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진실이 어떻게 찢어 발겨지고 목숨이 끊기고 유린당하고 파묻히는지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증언해야 한다고 배워온, 살아남은 자들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모으고 모아 기워낸 말들로 최대한 진실을 복구해내 책임자에게 사과받고 싶다는 게 이들의 거의 유일한 열망이다.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돼 온 사람은 전두환 씨였으니, 이들이 바라온 건 전두환 씨의 사과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어쩌면 39년 전의 상처, 그리고 오래된 상처가 이어져 온 이 도시의 풍경에 불과하다.
그리고 2019년 3월 11일, 전두환 씨가 광주에 왔다. 32년 만이었다. 이유가 근사하지는 않았다. 전두환 회고록을 내며 사과는커녕 자신은 5.18에 대해 책임이 전혀 없다고 부인하고, 5.18 증언자를 오히려 비하하고 모욕한 죄로 기소된 것이다. 5.18을 늘 ‘광주사태’ ‘폭동’이라고 불러온 전 씨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알츠하이머와 건강 핑계로 광주 재판을 피하려 했지만,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자 마지못해 이뤄진 광주행이었다. 경위야 어떻게 됐던 사람들은 법원으로 몰려들었다. 혹시 사과할지도 모른다는 조그만 기대가 현장에 일렁였다. 전 씨가 도착하기 직전 법원 주변은 다소 수선스러운 흥분으로 들썩였다. 사과할까? 안 할 거야. 그래도 사과할지도 몰라. 한마디는 하지 않겠어? 흥분 섞인 추측들이 오갔다. 만일 단 한 마디로라도 사과를 한다면 “끝내 전두환 씨는 5.18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라고 쓰인 현대사가 바뀌는 결정적 순간이 될 것이었다.언론사들도 일제히 전 씨의 입에 눈이 쏠렸다. 5.18과 관련해 결국 다시 재판을 받게 되는 전 씨의 운명에 집중하는 곳도 있었고, 사과가 나올지에 집중하는 곳도 있었다. 그날 전 씨는 오랜만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다. 전 씨가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차에 내리는 순간, 공동 취재를 맡은 언론사 기자 두 명이 마이크를 쥐었고, 질문했다. “5.18 발포 명령을 했냐”는, 그러니까 군을 동원해 시민을 죽인 책임을 인정하냐는 질문이었다. 전두환 씨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이거 왜 이래?” 그 순간, 현장에 보이지 않게 끼어있던 조심스러운 낙관은 푸스스 바람이 새듯 가라앉았다. 사과는 없었고, 없을 것이고, 아마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다. 끝내 사과를 받지 못할 걸 갓 알게 된 사람들이 잠시 멍하게 말을 잃은 사이, 전 씨는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피의자석에서 판사의 말을 들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광주로선 모욕적인 순간이었다.
전두환 씨가 다시 법정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전 씨가 탈 자동차 주변을 빽빽이 에워싸고 있었다. 만일 전두환 씨에게 광주에서 사과할 마음이 있었다면 이번이 유일한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사람들은 흥분한 상태였다. 전 씨를 가로막고 끝까지 사과를 받아내자는 사람들로 법원 앞은 금세 아수라장이 됐다. 누군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인파 속을 비틀비틀 걸었다. 사과해요, 사과해달란 말이에요. 얼굴은 말라붙은 눈물 자국과 새로 흘러내리는 눈물로 범벅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5.18 당시 어린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다. 평정심을 유지하자고 서로를 다독여왔던 사람들은 영원히 사과받지 못할 것이란 확신 속에 분노했다. 굳게 닫힌 차 문을두드리는 사람, 차 앞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차는 느릿느릿 나아갔다. 막아서는 경찰과 흥분한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구름떼같은 인파가 전두환 씨가 탄 차를 둘러싸고 행진하는 모양새였다. 결국 사과하지 않고 가는 전두환 씨의 뒷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옆에서 터진 울음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마른 몸집에, 키가 작달막한 할머니가 가로수를 부여잡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끼인 채로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게 하자 할머니가 겨우 말을 뱉었다. 저 사람이 남편 죽였어. 그런데 사과 안 하고 가잖아. 왜 사과를 안 해. 왜 안해. 남편이 죽었는데. 남편이 저 사람 때문에 많이 아팠는데 후유증에 내내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죽어버렸어. 내가 평생 그렇게 살려보려고 했는데. 사랑했는데. 혼자 어떻게 살라고. 기사에 쓰일까 싶어 녹음용 마이크를 켰던 손이 부끄러웠다. 주변에 물으니 얼마 전 숨진 5.18 유공자의 가족이라 했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할머니를 팔로 감싸 안고 인파 속을 조심조심 걸어나갔다. 회의주의자가 아닌데도 희망 어린 위로 한마디 건넬 수 없어 입은 다문 채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날, 절망했다.
“전두환 씨의 사과는 물 건너갔다”라는 게 그날 이후 광주를 압도한 정서다. 전 씨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말이 나왔을 때, 사과를 받지 못할까 봐 광주사람들이 그의 병을 가장 걱정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의 사과는 중요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며 그 역사적 의미를 이미 인정받았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지난 10년간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건은 태반이 폄훼와 모욕이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보훈처는 5.18 기념식에서 5.18의 대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극우 사이트에서는 죽은 학생들의 시신을 태극기로 감싼 관 사진 밑에 ‘홍어 택배’라고 폄훼했다.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혐오 발언이 게시됐다. 이런 폄훼의 중심에 있는, 5.18이 북한 소행이고, 당시 광주 사람들이 북한특수군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정쟁용 무기로써 힘을 얻어 자유한국당을 발판 삼아 이젠 국회 안으로까지 함부로 틈입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에 미 국방장관과 CIA 등이 참석한 미국 백악관 최고위급 회의에서도 북한의 움직임이 없다는 보고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는데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가짜뉴스는 사그라들 줄 모른다. 국회에서 버젓이 이런 주장으로 토론회를 열고 판을 깔아준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이라며 거든다. 그리고 여론의 비난에도, 이들에 대한 징계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더럽혀지자 어머니들은 올해도 진상규명을 해달라며 다시 국회에서 악을 쓰고 울었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듯한 풍경이다. 이런 모습이 지겹고 피곤한 사람들은 이 장면의 원인을 돌이키기 전에, 광주는 참 희한하고 시끄러운 곳이라고 고개를 돌린다. 전두환 씨의 사과가 그토록 절실했던 건 이런 외면 때문이기도 하다.
전두환 씨가 광주에 온 날, 법원 옆 초등학교 창문에서는 아이들이 몰려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5.18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일 터였다. 아이들은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쾌활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 세대가 학교에서 ‘오월의 노래’를 부르며 자랐듯, 광주에서 태어난 그 아이들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두환 씨가 광주에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일찍이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들의 말은 힘차고 싱싱해서, 저물어가는 전두환 씨의 “이거 왜 이래?”라는 역정에 대적할 가장 건강한 방패막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가난한 도시에서는 진실은 늘 그런 식으로 이야기되며 보존되어 왔으니까. 뜻 없이 자주 그들이 그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그날 본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이들이 알고 있다. 언젠가 모든 게 지워져도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은 자들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알고 있으면 된다. 기억하면 된다. 5.18로부터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감추는 것, 속이는 것, 타협하는 것, 가짜인 걸 알면서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손잡는 것, 외면하는 것, 민주화운동이라고 기리는 척 정쟁의 카드로만 소모하는 것, 진상규명을 방기하는 것, 모두가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라고 외치던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 아이들이 어린 시절의 파편을 모아 이야기를 하나로 꿰어볼 수 있을 때쯤,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도.
VOSTOK 17호 <다크투어리즘> 수록
IN JEONG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