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시카고플랜.로마제국쇠망사.에드워드 기본.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2012
로마제국쇠망사
'046 기본(Gibbon, 1737-1794)/로마제국 쇠망사(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88) 제15-16장'(시카고플랜 4년차 목록 중에서)
목록에서라면 15장과 16장 이 논란 많은 장만 읽으면 되겄지.
그렇다고 이왕 집어든 책 나머지 부분을 그냥 넘길수는 없잖아.
1장 2장만 읽으라는 것두 아니라 15,16으로 건너뛰라니.
그래갖고 내용을 제대로 알수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결정 했다.
「로마제국쇠망사」 전권에 도전하자!
1. 로마제국쇠망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서관에 갔더니 어라 먼가 이상하다?!
민음사 걸로는 6개권으로 구성되어있고
어디 출판사걸로는 두툼한 한권 양장본도 있고
동서문화사 -
도서로마제국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지음 .강석승 옮김.2007
두리미디어 -
(청소년을 위한)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원저 .배은숙 지음.2010
책과함께 -
에드워드 기번 지음 .이종인 옮김. 2012
이 세 권을 꺼내들고 무슨 사정인가 알아본즉슨
민음사 버전이 진정한 원서 완역본이고
그 외는 축약본인 것을 알았다.
축약본이라 하여 대한민국 출판계만 독단적인 행보는 아니었다 한다.
원서의 고향 영국 등 영미권에서도 꾸준히 축약본은 출간되어왔던 것.
완역본이냐 축약본이냐
일단 민음사에 대한 기본적 신뢰와 미련은 벗어던지고 ㅎ
동서문화사와 책과함께의 두 권중에서 번역자 후기등을 꼼꼼히 살펴본다 ㅎ
동서문화사는 그래서 일본서 출간된 편역본을 메인 소스로 번역편집한 책이고
책과함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영미권 편역본을 원서로 삼았다고 한다.
2. 책과함께 버전으로 결정한 이유
무엇보다 내가 결정적으로 책과함께 버전으로 마음을 굳힌 것은 번역자의 이 축약본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ㅎ
사마광의 256권짜리 「자치통감」 을 50권짜리 「통감절요」로 축약해 조선시대 지성들에 지식의 양식으로 기능해온 사례를 빌어 완역본이나 이 축약본이나 본질은 똑같더라는 말을 믿고 싶어졌다.
이 무거운 책을 안고 집에와 자세히 읽어보니 심지어 기독교 성체교리까지 갖고 와 설득하는데 완전 믿고 싶고 더욱 아멘이 되더라니깐 ㅎ
물론 완역 6권 도전의 가치 왜 안 아쉽겠어 ㅎ
풍성한 각주와 고대와 중세 서구 문명의 디테일이 빠졌다니 물론 안타깝지
그치만 본질이 똑같다잖아 ㅎ
이 책도 무려 1148쪽짜리 옛날 전화번호부보다 두껍다니깐!
선택은 끝났다.
이제 가는 길만 남았다.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라는 이 (원제조차 )장대한 길을 .
3. 로마제국쇠망사 감상을 도와준 세 가지
본격 로마제국쇠망사 독서 시간.
첫 구상부터 마지막 탈고까지 23년이 들었단다 ㄷㄷ
총 여섯권은
그 안에 일흔 한개의 장으로 단락이 나뉘어있다.
그리고 각 장은 1권 1장에서 6권 71장까지 통합되어 번호를 매겨놨구.
그러니까 시카고 플랜 속 15장 16장은 책 전체에서 갖는 의미나 상징성 논쟁성은 고유명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
1장에서 만난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이름.
아차차!
책 제목이 「로마쇠망사」 가 아니라 「로마제국쇠망사」!
그러니까 로물루스 레무스 이야기가 나올줄 예상하고 있다가 제정신 다시 차리게 됐다 ㅎ
내게 로마 이야기의 레퍼런스가 되어준 두 가지.
하나는 미드 ROME 이다.
이 스펙타클과 리얼리티 충만한 대하사극에서
가상의 두 로마병사 주인공들보다 선명하게 남는 캐릭터는 역시나 왜때문인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다 ㅎ
두번째는 새로 만들었다는 「먼나라이웃나라」 ㅎ
여기선 제정 이전 공화정 시대의 번창이 인상깊었다.
어찌되었건 성기게나마 로마역사의 뼈대를 세워준 책이었다.
그리고 미드 ROME은 시대의 미장센과 뉘앙스를 잡게 해줬달까
다신교문화, 군인중심의 사회, 귀족들의 사치, 생동하는 지성들의 무대.
6권 후반부에서 오스만투르크의 등장을 예감할 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던 책 한권이 있다.
아도라 ( 버트리스 스몰 지음)
내가 학창시절 정말 감동적으로 읽은 대하역사로망 .
이 책은 이제 절판되었다.
당시 도서관에서 처음 접했었고 헌책방 순례하다 발견하고 얼른 집으로 모셔온지 십수년이다 ㅎ
책만 모셔놓고 읽지는 않아서 주 무대와 주인공들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단지 여주인공 테아도라와 남주인공 뮤라드에 대한 것만 간직하고 있다.
로마제국쇠망사 다 읽고 나믄 이 책 다시 읽어야겠다
해제에서 역자가 말한대로 , 무엇보다 이 책이 유명할 수 있었던 이유대로 책은 첫장부터 시원시원하게 읽혀진다.
저자 에드워드 기번의 문장력이 그렇게 출중했다지
나는 번역자 이종인의 솜씨가 더 고맙다.
교과서의 건조체 그 전형인듯 깔끔하면서도 원작에 표현된대로 묘사와 정리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매우 웅변적이고 유려하다.
4. 마침내 로마제국 망하다.
각장당 1시간씩 걸린 걸로 어림잡아 계산하면 꼬박 72시간 + Å 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런 장대한 역사서를 읽을때마다 늘 궁금한 게 있었다.
나라와 문명들이 그대로 3인칭의 인격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관통해서 정리된 입장이겠지.
특히나 기본의 서술방식은 더욱 서사적이다.
그래서 동로마, 게르마니아 등등의 나라나 민족이 아닌 그 안의 구성원의 이름들을 그대로 주어로 삼았다.
예를 들어 서방 사람들은 동로마사람들이 쪼잔하게 교리문제나 제기해서 증오했다,
동방 사람들은 라틴인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 ..
이렇게 기술할수 있으려면 당대의 역사서와 개인 저서에 담긴 정세와 가치관을 직접 읽고 결론을 얻어서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기본의 역사적 추론에서 나온 판정문일까?
아무튼 그런 표현들이 몰입을 도와주고 글이 정말 재미있게 만든 효과가 있다.
5. 그러나 로마제국 쇠망사는 길어도 너무 긴 대하장편사극.
재밌기야 했지!..
각장의 구성이 깔끔하고 번역도 훌륭해서 천년의 역사를 단 한권으로 몰아보는 맛은 기가 막히지!
다만 앞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나 풀르타크 영웅전으로 단련해오지 않았으믄 로마의 장구한 역사는 그 고대식 이름의 바다에 빠저 허우적거리다 끝났을뻔;;;
그래도 너무 길었다.
대하드라마야 그래도 3~4대에 걸쳐 서 너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확대되는 법이지마는
로마제국 쇠망사는 71개장중에 주인공이 최소 71명이구 , 것두 주인공의 각각의 적대자들과 중심 조력자들 수를 헤아린다면 ㄷㄷㄷㄷㄷ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자 이종인 이냥반은 이걸 어케 세 번이나 읽을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삼국지 많이 읽은 사람하고 상종을 말라는 격언이 있었겠지.
역사서를 그렇게 읽어대면 세상사 초월한 경지가 얼마나 대단할까 ㅎ
6. 역시 고전은 인간학 교과서.
국부론 혹은 군주론을 읽었던 당시 강렬한 인상은 그러했다.
인간성에 대한 강력한 통찰력을 경험했다는 것.
로마제국쇠망사의 인간 군상들은 더더욱 적나라하다.
의로왔던 황제의 목을 들고 다니는 비열한 근위대 앞에서 제위를 흥정하는 인간들,
글자 하나, 성찬식 떡의 종류 갖고 싸우는 기독교도들 모습,
나라의 멸망은 생각지 않고 순간의 권력에 휩쓸리는 황실 황족들의 모습
그러니까 로마제국쇠망사를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는 교훈을 얻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ㅠ
그게 슬프다.
책은 책이고 지금 내가 닥친 욕망과 싸움은 또 별개다.
별개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기도 하고 지금의 언론인들의, 검찰의, 재판관들의 모습이더라 ㅠ
7. 마지막 돌아보는 로마제국쇠망사의 가치
저자 에드워드 기본이 본서 마지막 에필로그 장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단 열몇줄로 요약해놨다.
" 카이사르들은 교묘한 정책을 수립하여 자유공화국의 이름과 이미지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군사적 전제주의는 로마 사회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기독교의 여러교파들이 흥기하여 로마 사회에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에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것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어 힘이 분산된 것도 쇠망의 한 원인이었다.
게르마니아와 스키티아의 바바리안들이 제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도 변수였다.
민법이 확립됨에 따라 여러 제도가 안정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마호메트의 주도 아래 새로운 종교가 일어나 전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교황들이 정신적 주권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 통치권도 함께 갖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통치아래 서유럽이 제국의 면모를 회복했으나 그의 사후에 붕괴되고 말았다..라틴인들은 동방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사라센과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며 결국 투르크족이 이 도시를 함락시켰고 , 이로인해 그리스 제국은 멸망했다.
중세에 들어와 로마 시는 많은 변모를 거듭했다"
(p1115~1116)
이 열 두 줄안에 서양사의 핵심 이슈가 다 들어있다.
이렇게 세계 역사의 한 면을 조망하게 해준 역사가의 노고에 감탄과 찬미를!
나는 그가 특히 인문학의 핵심을 짚어준 것에 머리에 불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천재는 성숙의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개인을 교육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백성을 교육시키는 데도 이성과 상상력의 힘이 확대되기에 앞서 먼저 기억에 의한 암기가 있어야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선배들의 작품을 철저하게 모방한 이후에 비로소 그들과 동등해지거나 아니면 그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쌓게 되는 것이다.(p1060)
창의성도 결국 축적된 지식과 숙련으로 생기는 거지.
아는 것도 없어서 사고력도 없는 마당에 무작정 토론하고 자유롭게 상상한다고 창의성이 생기나?
이런 교육 풍토에서 지성이 메마르고 감정적 , 자기본위적 요구와 아집만 들어나는 것 같다.
이러다 우리나라도 서구권의 몽매한 자유주의자 세상이 될 것같다.
고집쟁이 PC쟁이, 음모론 주의자들 세상말이다.
오늘날 교육계가 암기위주의 교육방식을 폐기하고 토론과 자유교육 등으로 창의성을 지향하는 교육정책들을 펴는 것에 대해 통렬한 지적이 될 것같다.
내게 에드워드 기본을 소개해준 시카고플랜에 또 한번 감사해하며 마흔여섯번째 미션 클리어 ^^
이제 본격 리뷰
저자 서문 & 편역자 해제
저자 서문은 맨 앞에 총 두 개가 수록되어있다.
하나는 로마제국쇠망사 첫 권에 올린 글.
앞으로 쓸 내용에 대한 대략의 저술방향을 소개하고 있다
두번째는 마지막 4,5,6권을 동시 출간할 때 책 전체를 마무리하는 소회를 담아 쓴 글이다.
서문만 놓고 저자 에드워드 기번에 대해 갖는 느낌이라면
그는 유쾌하고도 느긋한 성미를 가진 사람 같아보인다.
자신의 책이 성공하고 이어질 명성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는 모습이며
이 모든 방대한 노작에 필요한 것을 언급할 때 자연스레 드러나는 그의 신상들을 보니
솔직한 인품인 것에 빠져들게 된다.
무엇보다 글 자체가 (물론 번역가의 세련된 번역 덕분이지만) 시원시원하다.
이런 톤이라면 가뜩이나 내가 좋아하는 고대 역사 이야기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기대를 안할 수가 없다는 거다!
역자 해제.
역자 해제에 대해서 놀라는 두 가지.
하나는 역자 이종인이 로마제국쇠망사 전 여섯권을 무려 세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
그래서 로마제국쇠망사의 가독적 가치를 문학적을 설명해줄 수 있었나보다.
두번째는 그래서 역자 이종인이 로마제국쇠망사 덕후로서의 덕력이 드러나 있더란 거.
해제문 안에 로마제국쇠망사 본서 뿐 아니라 각종 인문학적 상식이 가득 들어있다.
우선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역사의 교훈과 인생의 지혜와 창작의 힌트를 언어간 사례들(p1126)
윈스턴처칠, 네루 , 카바피 , 크리스티안 몸젠, 투머스 칼라일, 예이츠, 로버트 그레이브스, 고어 바이덜이 그들이다.
'그 외에 현대에 들어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정치가, 사업가, 사상가, 학자, 교육가, 소설가는 무수히 많다.
영국 사상가 아이자이어 믈린이 말한 역사 기술 방식에 대해서도 배운다.
"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두더지는 한가지만 안다"(벌린)(p1138)
여우형 : 셰익스피어, 아리스토텔레스,헤로도토스
두더지형 : 단테, 플라톤 , 투기디데스
호모 숨 ?호모 히스토리쿠스 숨!
호모숨 (Homo sum 나는 인간이다)
호모히스토리쿠스 숨(homo historicus sum나는 역사학적인 인간이다)
삼십여페이지를 읽었는데
로마제국까지는 아직 멀었다.
1권
●'태평연월의 시대 '(p 50,51)
1장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의 로마제국 판도
1장은 1장답게 로마제국의 영역을 다룬다.
'기독교 시대의 2세기에들어와서 로마제국은 지구상의 가장 비옥한 땅들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문명 지역을 그 판도 내에 포섭했다.(p25)
이것이 가능하게 한 로마제국 군대의 특성.
' 자유로운 정부의 존속과 번영을 지켜야한다는 의무감' 이 고대인들에겐 애국심과 동의어였다고 .(p31)
때문에 공화정의 군대는 상승불패의 군대가 될 수있었지만 제국 시대 군대는 대신에 명예와 민간신앙을 사기진작의 핵심요소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상무정신이 투철해서 실제 군사훈련도 그렇게 빡세더라고.
-제국의 5현재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파누스,안토니우스 |
●제국의 쇠망은 하나의 혁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 그 여파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게 지금까지 남아있다.(p26)
2장 안토니누스 시대의 내부 번영
앞서 영토와 군사력의 외형을 살폈다면 이제 제국의 통치스타일 속에 번영의 이유를 찾는 시간.
통치에 있어 종교정책은 고대시대 가장 우선 정책일 듯.
로마는 그런 면에서 관대한 다신주의 종교포용정책을 썼다.제국과 속국간의 융합정책 또한 이 관용성을 그대로 적용시켰다고 한다.
폐쇄적 순혈주의를 지양했고제국의분열만 초래하지 않는다면 제국과 동일한 법적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
다만 언어정책과 도로관리는 확실히 제국위주로 일원화를 추구했는데
언어정책은 실패했고 도로 등의 토목정책은 제국내 속주 뿐 아니라 제국의 변영에 엄청난 혜택을 주었다
동서 6040킬로미터에 달하는 제국을 로마를 통하는 직선도로로 관통시켜낸 토목건축의 대가들이 로마인.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말이 연상되었다.
앞서 언어정책.
법률과 행정 공식언어는 로마의 모국어 라틴어로 강제했지만 로마도 제패하는 데 실패한 문화선진국 그리스의 언어 그리스어만큼은 통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국내 동 그리스어, 서 라틴어로 언어사용분포가 양분되는 그림을 노정했다고.
●현재의 불완전한 사회 조건을 볼 때 , 악덕과 우둔의 소치인 사치는 재산의 불균등한 분배를 시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순산인 듯하다.(p48)
●과거를 칭송하고 현재를 깎아내리는 인간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태평연월은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속주민들에게도 따뜻하게 느껴졌고 또 솔직하게 인정되었다.
( p50)
● 이 태평연월의 시대에 시인의 이름은 잊혀져갔고 웅변가믜 이름은 소피스트가 찬탈해버렸다.
한 무리의 비평가, 편찬자, 논평가들이 학문의 얼굴을 어둡게 했고 , 천재가 쇠퇴하면서 학문의 수준이 타락하게 되었다.( p51)
3장 안토니누스 시대의 국가제도
제정시대하면 황제들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지
아우구스티누스 .드라마 ROME 에서 유약한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옥타비아누스
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살아생전 황위계승권자로서 전임 황제 생존시에 이미 막강한 권력을 나눠가졌다는 사실.
이는 후대들에게 고대로 학습이 되어 황제권 강화책의 하나로 쓰임받았다.
1)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2) 네르바 + 트라야누스
3)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2대
'세계사에서 사람들의 생존 조건이 가장 행복하게 번성했던 때를 들라고 한다면 마땅히 도미티아누스의 사망에서 콤모두스의 등극에 이르는 시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p65)
곧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두 안토니누스 이름하여 5현제 시대다.
이때 로마제정이 참으로 평화롭고 명예로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명상록」의 저자가 이 5현제 시대 마지막 주자 마르쿠스 아우렐리무스 안토니누스 라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두 황제간의 권력 이양 이야기가 제일 인상깊었다
하드리아누스 자신부터 전임황제 트라야누스로부타 인정받고 입양의 절차로 제국수호의 책무를 상속받은 사람이다.
그런 자질과 경력을 가졌으니 자신의 후임자에 대한 기준 역시 탁월했겠지.
그는 50세 원로원 의원과 17세 청년이 동시 에 눈에 들어왔다 .
하드리아누스는 놀랍게도 50세 원로더러 17세를 입양케하고 그 둘을 그대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의 안목은 정말 탁월했다 .
피투스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친아들들보다 양아들 마르쿠스를 더욱 황제 후계자로서 양육했고
마르쿠스는 피투스에 대해 황제로서의 충성과 아버지로서의 존경 모두를 바치며 헌신했다.
고대세계엔 이렇듯 덕성있는 영웅들의 시대
그러니까 역사 이야기가 짜릿하고 재미지지.
그리고 로마인의 두 가지 곤경.
분명 공화정 시대가 남긴 자유정신을 기억하면서도 이를 억압하는 제정시대의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벗어날 공간이 없다는 사정.
로크나 루소는 자국에서 사상탄압읏 받으며 인근 나라로 옮겨가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3장의 끝은 키케로의 염려스런 한마디로 마무리된다.
" 자네가 어디를 가든 정복자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말게 "(유배가는 마르켈루스에게.p68)
● 아우구스투스는 사람은 이름(명분)에 의해 통치된다는 것을 민감하게 의식했다.
사람들이 여전히 옛날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선전만 적극적으로 한다면 원로원과 시민ㄴ슬이 노예의 신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했고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p60)
● 티투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치세 시기는 역사의 소재가 될 만한 자료들을 별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진귀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인류의 범죄, 우행, 불운의 기록일 뿐인 것이다.(p65)
4장 콤모두스 황제
5장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위를 돈 주고 사다
6장 카라칼라의 포악과 엘라가발루스의 황음
7장 마시미누스의 학정과 죽음
4장부터 6장까지의 왕들에 대해 저자는 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에 등장한 쓸모엇는 후계자들을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 (p 66)
그러함에도 저자는 무려 4개의 챕터로 나눠 그들의 악행과 명멸을 나열하고 있다.
콤모두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러셀 크로우를 그렇게 못잡아 먹어 안달하던 로마의 패주. ㅎ
놀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의 저자인 것과 호아킨 피닉스의 아버지가 이 5현제 마지막 황제였다니 ㅎㅎ
콤모두스는 시해되고 그를 대신해 추대된 성군(이 될뻔한 ) 페르티낙스 황제도 또 근위대들에게 시해되고.
황제의 시해가 일상다반사가 될 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가장 어이없고 참혹한 촌극이 그 다음에 일어난다.
페르디낙스 사후 황제 살인자 근위대와 황제 지망생들이 벌인 황권의 경매.
거기서 최고가를 매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그밤 한 숨도 못잤더라고 ㄷㄷㄷ
그가 걱정한대로 율리아누스 황제는 전투경험 많은 야전사령관 세베루스에게 제위를 빼앗기게 된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기본의 한마디 촌평.
" 세베루스는 로마제국을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생각했고, 그 재산의 소유권을 안전하게 확보하자, 그 귀중한 물건의가치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 (p 90)
그의 이런 평가가 없다면 그가 행한 " 유익한 법률 실시, 권력 남용 사레 시정, 사법 행정에서 황제의 공정함 수립, 특히 민중 편향적인 재판 (p 90)의 기사들을 보면 세베루스가 대단히 훌륭한 황제라 인식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기본이 정리해준 로마제국 1000년의 역사
1. 건국 이래 첫 400 : 가난에 시달리며 전쟁과 정부의 미덕을 획득했다. 2. 이후 300년 : 용기를 발휘하고 운명의 도움을 받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에 절대제국 수립. 3. 마지막 300년 : 화려한 번영과 내부 쇠퇴의 길을 걸었다. (p 128) 로마인 35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군인, 행정관, 법률가의 나라는 거대한 인류의 덩어리 속으로용해되었고, 로마인에 걸맞은 고상한 정신은 없이 로마인이라는 외적 자격만 획득한 수백만명의 예속적인 속주민들과 혼융되었다. (p128) |
-원로원 악화의 최고 책임자 세베루스 -카라칼라와 게타 공동황제 -카라칼라 사후 마크리누스와 엘라가발루스의 내전 -엘라가발루스 : 카라칼라의 친척.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 앨라가발루스의 이종사촌 |
●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자신이 저지르는 무절제한 짓을 남에게서 발견하면 그것을 서슴없이 비난한다. (p 103)
8장 페르시아의 종교와 정치
지금까지 로마제국 숱한 황제들이 주로 근위대 병사들에게 의해 살해되며 제위가 불안한 정정을 봐왔다.
저자도 말하길 로마의 문제는 내부에 있어왔다고.
그러나 로마가 약해지는 틈을 타 게르만족들과 동방의 또 다른 강국이 제국의 위협이 되는 현실을 짚게 된 것이다.
그 첫주자로 페르시아를 말한다.
내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세계사의 주역으로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페르시아를 기억한다.
이 페르시아는 중동 지역에 소재하고있는데 ( 오늘날 이란 ) 그 지역 역사가 좀 복잡했다는 걸로 말이다 ㅎ
아무튼 페르시아는 이후 성경에서도 중요한 무대가 된다. "바사"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상세히 안내된다.
'끝이 없는 시간'이라는 세계 창조의 절대자는 오히려 인격이 없는 관념 자체로 설정.
'끝이 없는 시간'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활동에 의해 세상의 창조와 전개가 이뤄진다는 설정?
그리고 마지막엔 이원의 세계중 밝은 선의 세계가 승리한다는 종말론적인 설정까지.
여러모로 기독교의 이니셔티브를 자기들 입맛에 확 끌어와 수정해놓은 듯한 인상.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알려준 모방 방식 두 가지중에서 페르시아인들은 '아이디어 확산'의 방식을 활용한 것 같다.
(<<총, 균, 쇠>>3부 12장에서 )
창조주, 첫 타락, 죄의 방사 (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빠져나온 불행들처럼), 요한계시록 상 천상의 전쟁 등등.
-페르시아 종교 : 조로아스터교 (사제 : 마기) -magic :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신비주의 혹은 그 기술에서 유래된 말. -아르다시르의 야망 : 로마를 제압하고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 |
9장 게르마니아의 문화와 풍습
지난 8장에서
세계제패라는 먹이를 노리는 두 마리의 호전적인 맹수 이야기를 만났다.
주인공 로마와 동방의 페르시아다.
그런대 갑자기 9장은 게르마니아 이야기 한참을 한다.
게르마니아 고트족 = 서고트 + 부르군트+ 동고트 프랑크족= 살리족+리부아리아족+참비아족+"튀링기아족 색슨족 =색슨족+ 앵글로색슨족+프리지아족+ 랑고바르드족 바바리아족= 알라마니족+ 바바리아족 |
보다시피 이렇게 복잡한 종족구성을 가진 세력.
로마는 바로 페르시아라는 거대 맹수가 아니라
게르마니아땅의 들개떼에게 물어뜯겨 죽은 꼴.
그래서 게르마니아의 상황과 풍습 등을 세심히 살펴보았는데 결론적으로 철제 무기며 단결력이며 이렇다할 세력은 못되었던 현실.
그러니까 그 막강한 로마군단 내의 부패와 부실이 이 들개같은 야만인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
그래놓고 게르만족 그들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문명의 세례를 받지못한 채 여전히 변방에 머물렀다더라.
참 희한하고도 놀라운 민족이다 ㄷㄷㄷ
10장 치욕과 불운의 20년
로마제국 쇠망사는 이렇게 각 장의 제목들부터 장엄하고 서사적이다.
필리푸스 황제에 맞서 군인들이 내세운 마리누스 황제를 역사는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는가보다.
원로원이 진압 사령관으로 보낸 데키우스가 이 마리누스를 대신해 황제로 강제 옹립된다.
데키우스 황제는 또 어이없이 발레리아누스에 의해 교체되고 그는 공동황제 아들과 함께 7년, 그 아들 단독으로 8년 도합 15년의 장기집권을 성사시킨다.
발레리우스는 페르시아와 싸우다 치욕스럽게 멸망하는데 그 아들은 남아 8년을 더 황제로 있다가 또 반역으로 스러진 이 이 십년의 시기를 치욕과 불운의 시기라고 했다는 거.
프랑크족, 알라마니족, 고트족 등의 게르만족과의 전투와 동쪽에서 페르시아에 능욕당하는 로마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이렇게 불안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가장 고통받은 세력은 일반 민중이었고 그들이 당한 근본원인은 빈약한 경제기반으로 인한 만성 기아와 전염병 때문이었다.
거의 대량 전멸과 다름없는 어마무시한 인구절멸을 경험하는 로마 제국이었다고.
제국을 강하게 한 철기와 무력은 결국 압도적 다수의 인민대중에게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많은 기왕의 역사는 이 인구 절멸의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지만 인구는 역사의 중요한 변수가 되어주었지.
● 자신의 추측을 객관적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되겠지만, 인간성을 잘 알고 맹렬하면서도 물제한적인 열정의 결과를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 역사가는 때때로 그런 인간성에 대한 지식으로역사적 사료의 부족을 보충하게 된다. (p 146)
● 학문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군사적 무용과 성공의 시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p 158)
11장 클라우디우스의 통치와 고트족의 패배
앞서 발레이아누스와 갈리에누스 부자의 15년 장기(?) 의 시대는 제국 내외에서 로마의 명성에 흠집을 냈고 로마는 더욱 병들어 갔으며 이틈을 노리는 게르만 족들의 침입은 더욱 거세진 시기.
이들의 뒤를 이어 클라우디우스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제위 7년 여의 시간은 로마에 반짝 영광의 빛이 나던 시기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고트족에 대한 대승으로 이름조차 고티쿠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을 얻는다.
아우렐리아누스 역시 게르만족 중에서 앞서 10장에서 만난 알라마니족과의 싸움에서 기록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전투는 비단 야만족에 대해서뿐 아니라 제국내 반역세력에 대해서도 전공을 쌓았다.
희한하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상대한 제국 내 반역자들이 모두 여걸들이었다는 것.
두 개 세력을 향한 전쟁은 모두 승리하여 이제 제국내 로마 황실의 위험은 공고해졌다고 한다.
그러면 뭐하나 .
클라우디스는 그나마 친정중에 병사했으나 아우렐리아누스는 신하의 간교한 술책으로 피살을 당하고 만다.
로마는 정말 군인들이 문제다 .
그러고보면 우리나라도 군인들이 문제였다 ㅠ
그런데 지금은 검찰이 문제다.
이모무 검찰법이 일제시대때 독립군 때려잡을려고 만들어서 무소불위의 기소권 수사권을 갖게하다보니까네
대통령이고 여론이고 법이고 뭐고 없다 ㄷㄷㄷ
이제 그런 검찰의 최고 오야붕이 대통령 자리까지 차지했다.
전두환이나 박정희는 그래도 유식한 척 했고 뒤에서 호박씨를 깠는데
앞에서 대놓고 거짓말 하고 대놓고 사기치고,,,
아 그런 대통령이 또 하나 있었지. 아직 복역중이지
시리아의 여왕 제노비아
갈리아의 여왕 빅토리아
12장 계속되는 군인들의 전횡
13장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세 명의 공동황제
● 병사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무모한 짓을 한탄하며 후회했고, 그들이 방금 살해한 황제의 가혹함은 잊어버리고 서둘러 기념비를 세워 황제의 미덕과 전승을 칭송했다. (P182)
● 로마 황제들은 어떻게 처신을 했든 간에 그 운명은 거의 비슷했다. (P 176)
1. 아우렐리우스 사후 제위 8개월간의 공석 사태. 떠밀려 황권을 받아든 타키투스는 75세의 노신. 버르장머리없는 군인들 행태에 속앓이하다 죽었음. 2. 프로부스의 등극.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충실한 사령관.(제노비아 원정때도 등장했었음) 이번에도 이 성실한 황제에게 무려 천개의 칼을 찔러댄 막돼먹은 군인들. 3. 카루스 황제와 두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 공동황제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길에 병사했고 누메리아누스 역시 병사와 타살 두 가지 의혹 속에 살인범이란 자의 처형만 확실한 기록으로 남았다. 카리누스는 불미스런 치정극의 패배자가 되어 피살당했다. 4. 디오클레티아누스 누메리아누스 경호실장이던 디아클레티아누스. 공동황제로 막시미아누스 추대. 이어 다시 부황제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추대 결국 세 명의 공동황제들과 함께 이룬 20년간의 정치안정. 제위 21년해엔 평화로운 정권이양까지. |
이상 두 개의 장에서 또 바쁘게 오르내리는 로마 황제들 간략히 정리해봤다.
물론 12장과 13장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주제가 있다.
로마 제국 말기 이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욕을 자제하고
4명의 공동황제를 통해 제국을 분할 통치하며 안정을 추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같은 황제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감동적인 장면을 낳았다.
우선은 어찌보면 교활해보이기까지 하는 능수능란한 처세술의 달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런 능력으로
성정이 다른 막시미아누스와 평화로운 공동통치를 해냈다는 것.
그리고 역시나 부황제로서 선임한 두 사위이자 양아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막판엔 제위까지 선양하는
놀라운 선지자의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개인적인 덕성은 반면에 로마 제국 역사에는 나쁜 선례를 낳았다.
바로 그점때문에 13장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로마를 따로 분류한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그가 정치안정을 위해 구도한 공동황제의 분할통치는 이후 로마 분열의 단초를 낳았다는 것.
14장
1.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두 정제의 선위 2. 정제로 승진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 3. 갈레리우스 : 부제 막시미누스와 세베루스 선정 4. 콘스탄티우스 사후 아들 콘스탄티누스 부제 등극 => 현재 황제 4명 5.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 두 로마황제 : 세베루스 황제 사망 -=>현재 황제 5명 6. 리키우니스 부제 등극 => 현재황제 6명 |
여전히 복잡한 권력싸움.
무려 여섯명의 황제들 이름이 나오는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이후 고대제국의 이름들은 이제 제법 입에 붙지만 그 족보는 여전히 헤깔린다.
역사관의 종류가 많이 있다 .
어린시절부터 익숙한 사관은 왕조의 변천이 주된 이슈였다.
거기에 법과 제도 그리고 종교와 문화등 각 분야의 변천은 별개의 분야로 공부해야 했다.
이 방식을 대체하여 이제는 주류로 인정받는 과학적 유물사관이 있다.
인물 중심의 역사관은 역사의 주인 인민대중 즉 people 이라는 절대다수의 피지배계층을 소외시켰다.
사회의 기본 동력인 이 다수대중의 지지기반은 곧 물질의 기본 흐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그러니까 생산과 분배 소유의 제도에 따라 역사속 사회를 규정한다.
역사적으로 공인된 총 다섯개의 사회제도가 있다.
생산구조를 기준으로 설정된 사회구조의 가장 최근 형태는 범 자본주의다.(초기 자본주의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포함)
이는 시기적으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발현되는 시기와 비슷하게 출몰하기도 하고 또 발전하였기에 동양 그리고 특히 우리 한국에선 자국의 역사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것이 사학도들의 숙제같은 거였다.
어찌되었건 서구중심의 역사를 극복하려는 의도도 있었고.
그 모든 역사서를 혹은 역사'썰' 을 나름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14장에서 만나는 에드워드 기본의 역사관은 신박한 면이 있다!
그의 로마제국(쇠망)역사는 물론 황제중심으로 전개되고는 있지만 거기서 법과 제도 특히 세제 변화의 역사적 정황도 함께 통시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또 그의 역사서가 감칠맛 나는 결정적 이유!
원래 과학적 유물 사관 이런게 객관적이고 지적인 재미는 있다.
근데 왕조의 변천과 전쟁 그 속에서 수많은 인물의 명멸을 보는 건 분명 드라마보다 훨씬 극적이라는 거다.
소인배와 영웅 이야기 .
기본의 역사서 속에 등장하는 황제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사연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기준은 선과 악.
혹은 진실한 자와 방탕한 자.
한국 아침드라마 막장은 차라리 점잖았엉 ㅎ
그리고 그의 글의 가장 강력한 힘으니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저자의 단호하고도 전지적인 평가다.
그렇다.
문장이 물론 건조하고 객관적이라면 읽는 독자가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보람도 있겠지.
그러나 이미 저자가 평가한 관점을 믿고 수용하기만 할 수 있다면그것처럼 시원한 독서가또 있을까
그의 글은 그래서 더 몰입감이있다.
저자는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고 이미 분석을 마쳤다는 신뢰를 더해 지체없이 독자를 상황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니까 로마제국 쇠망사 이 책은 결코 어려울 수 없는 책이다.
단지 그 양이 어마무시한 부담감이 있을 뿐이지 ㅎ
15장 기독교의 교세 확장
로마제국쇠망을 다룬 역사서에 기독교에 대한 두 개의 독립 챕터라...
첫번째 장인 여기 15장에선 기독교 역사를 다루는 이유와 기독교 성장의 내재적 원인을 살피는 시간이다.
첫째로 다신교 국가인 로마에서 기독교가 교세를 확장해왔고 마침내 국가 정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장의 내재적 원인
1. 유대교와는 달리 이방인에 포용적인 기독교
2. 치열한 교리 논쟁
3. 기독교의 내재적 힘 1) 신도간 강한 응집력
4. 기독교의 내재적 힘 2) 내세 교리
5. 기독교의 내재적 힘 3) 기적
6. 기독교의 교세 확장과 내부 구조의 발전
등등으로 살펴보는 기독교의 역사속에서 저자가 파악한 교세 확장의 원인
1. 기독교도의 신앙적 열정 2. 내세 교리 3. 원시 교회의 기적 4. 기독교도의 도덕 실천 5. 기독교도의 단합된 조직력 ( p 232) |
결론적으로 당시 교계에서 욕 얻어먹을 만 했다 ㅎ
가장 거슬리는 것은 내가 앞서 14장까지 오면서 찬양하고 싶었던 그의 문체 때문이다.
그의 눈앞에 기독교와 기독교도는 마치 한무리의 야생동물처럼 관찰되는 피사체처럼 여겨진다.
객관과 중립을 빙자한 그의 태도가 나를 매우 불쾌하게 했다.
특히나 성령충만에 대해 여기서도 보이는 오해. ( cf「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
뭐, 황홀경이라고? (p 239)
나는 황홀경 없이도 방언을 받았는 걸.
방언받고 3년 여 동안은 내 방언을 의심했는걸.
이쯤에서 생각나는 책.
다시 읽어야겠다.
하나님은 내게 믿음은 주셨지만 지성은 안주셔서 그 책 내용이 하나도 생각안난다 ㅎ
무려 3년전에 읽었는데 ;;;;
16장 로마제국의 기독교 정책 : 네로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
1.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와 기독교도에 대한 평판 : 문화이자 역사이며 정체성인 다신교 숭배를 거부하는 비정상 집단 : 기독교도의 예배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추악한 비교 집단이라는 오명 : 유난히 고집스럽고 의심스러운 집단 2. 기본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정책이 교회사 안에서 실제 평판보다 훨씬 신중화고 온건했다 평한다. 1) 황제들이 기독교도를 단속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다. 2) 독특한 범죄 ( 자기 종교만 절대시)를 저지르는 백성들을 단죄하는 것에 대해 황제들은 신중하려했다. 3) 황제들은 절제하면서 처벌을 부과했다. 4) 늘 박해만 받는 것은 아니었다. ( P 264) |
이쯤에서 '로마제국쇠망사' 15장, 16장이 시카고플랜 리스트에 오른 이유를 생각해보려한다.
늘 여기 목록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의도를 의식하게 된다.
그러니까 시카고 대학에서 자기네 학부생들에게 미국의 시민의식과 대학인으로서의 지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선정한 144권의 위대한 고전들.
실제로 시카고대학에서 이렇게 프로그램을 8년간 진행해오면서 시카고 대학은 이후 미국 내 명문 대학의 반열에 올랐고 시카고대학은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아무튼 그런 시카고 플랜에서 로마제국 쇠망사 중에 15, 16장이 추천된 이유,,,잘 모르겠다.
차라리 로마제국쇠망사 전권이라면 모를까 ...
서구역사와 문화를 지배해온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를 기독교의 죄인으로 취급하는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16장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 에드워드 기본이 궁극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학 지성들도 유념하길 바라는 의도였을까?
'이교도의 열광 때문에 죽은 기독교도보다는 그들(기독교도들) 끼리의 내분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로마제국 멸망후 로마 주교들은 일반신자들에게까지 지배권을 확대했다.
로마 교회는 자신이 거짓의 시스템으로 세운 제국을 무력으로 옹호했다.
겉으로는 평화와 자비를 표방하던 시스템은 곧 추방, 전쟁, 학살, 이단을 심문하는 종교 재판소의 설치, 교황 권력의 강화 드응로 그 본색을 드러냈다. '(P 282)
16장에 들어서면 기독교도인 내가 가진 불쾌감이 많이 해소가 되었다.
박해는 박해고 기독교도가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는 태도가 옹고집으로 비쳐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나도 그런 비난과 멸시를 많이 받았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데서부터 은연중에 비치는 경멸의 감정도 읽은 적 많다.
그리고 나 또한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교회다닌 다는 사람 있으면 일단 피하고 봤다. )
앞서 언급한 '초대교회의 역사'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신앙을 고수하려 했던 그 순진무구함이 딱 6세기까지 기록된 책이다.
6세기까지란 건 의미있는 수다.
이후로 교회는 세속 권력이 되며 그렇게 경멸한 세속의 일에서 영광을 누려왔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계속 계속 생산해오면서 말이지.
그러니까 에드워드 기본 입장에선 이런 이후의 교회사를 다 알게 되고 또 그 안에 있으면서 부정적 감정이 왜 아니 생기겠는가.
어찌되었건 이 시카고플랜은 동양 문화도 몇 개 포함했지만 ( 막상 세어보니 달랑 논어 하나 ㄷㄷ)
서구 문화 위주로 편성된 리스트.
거기서 종교 특히 기독교의 명과 암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래서 이렇게 기독교에 발흥을 보는 또 하나의 식견을 접하는 계기로 삼아보련다.
2권
17장 콘스탄티노플의건설과 직제의 정비
로마의 공기를 마셔보지 못하고 자란 황제.
제국의 새 수도를 건설하다.
'도나우 강변에서 태어나
아시아의 궁중과 군영에서 교육받고,
브리타니아 군대의 추대로 보라색 옷을 입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라고 하면 침략을 일삼는 예전의 종속 왕국들을 연상했고
그런만큼 카이사르의 고장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p287)
1.콘스탄티노플 건설과 직제의 정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철을 밟으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척하려던 니코메디아 -집정관급(일루스트리스) 장관급 (스팩타빌레스) 차관급 (클라리시미) 2. 일루스트리스 1) 황제 자신과 기타집정관들과 귀족 2) 총독과 콘스탄티노플 2대 수도 시장 3) 기병 총사령관 보병 총사령관 4) 황제의 수석비서관 7인 3.로마제국 116개 주지사 명칭들 1) 아시아, 아카이아, 아프리카 대형주 : 프로콘솔 2) 콘술라 :37개주 3) 코렉토르 :5개주 4) 프레지던트 :71개주 4.민간행정 계통도 :황제 -총독(4인)-부총독(13명)-주지사(16명) 5. 콘스탄티노플시대의 취약점 1)약화된 군대 2)수석비서관으로 운영되는 밀실공포정치 :1만명의 민간스파이 6.그래도 당시 가장 선진적인 제국와 도시. -여전한 변방의 평화 -예술과 문학의 향유 - 군기 확립 -법률과 행정의 일원화 -종교와 철학의 번영 |
18장 콘스탄티누스의 성품과 네 아들
1.콘스탄티누스 황제 (306~337) 콘스탄티우스 -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티우스 + 콘스탄스 2. 콘스탄티누스의 형제 콘스탄티우스 -> 콘스탄티누스 +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 -> 갈루스 + 율리아누스) + 달마티우스(-> 달마티우스 + 소한니발리아누스 :콘스탄티우스에 살해) + 한니발리아누스 (콘스탄티우스에 살해) + 아나스타시아 ( × 옵타투스 : 콘스탄티우스가 살해) + 에우트로피아 (× 네포티아누스 :콘스탄티우스가 살해) +콘스탄티아(× 리키아누스 : 콘스탄티누스가 사형) 3.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들 = 크리스푸스 (콘스탄티누스가 사형) +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에 살해) + 콘스탄티우스 + 콘스탄스 (마그넨티우스에 살해) |
19장 단독황제콘스탄티우스
콘스탄티노플의 단독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둘째아들
위아래 두 형제들과의 내전에 승리했으나 광대한 제국 운영에 무능을 깨닫다.
이때 등장한 율리아누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의 동생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그러니까 책에선 조카라고 했지만 엄밀히 사촌이 지. (p315)
함께 살아남았던 갈루스 황제와는 달리 학문을 사랑하고 공정하며 관대하게 처신할 줄 알았던 황3제.
그로인해 갈리아는 평화를 얻고 군대의 기강이 서며 황제 율리아누스의 명성이 높아져 가다
20장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로마황제 기독교로 개종하다.
박해받던 종교 생성 300년만에 세계 최대제국의 국교가 되다.
'기독교의 공식 승인은 생생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가르침을 주는 가장 중요한 국내적 변화였다.'( p329)
1. 황제의 개종시기에 대한 다양한 기록 2.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독교 주요 변곡점 1) 303년 밀라노 칙령 3) 326년기독교 국교 선포 2)323년 니케아종교회의 3.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1) 리키우니스와의 마지막 내전 2) 라바룸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 군기 3) In hoc signo vinceris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하리라) |
21장 교회의 이단논쟁
1.각종 이단들 : 사모사타의 파울루스 지지자 :프리기아의 몬타니스트파 :노바티아누스파 : 마르키오니트파 :발렌티니아누스파 :마니파 :도나투스파 2. 플라톤과 기독교의 만남 1)플라톤의 신성이론 제1원인 + 로고스 (이성)+ 우주의 혼령 2)알렉산더의 원정으로 전파된 플라톤 철학 3)유대교와 플라톤철학의 만남 :필로 4)요한복음의선포 로고스의 성육신과 처녀탄생 그리고 십자가 죽음 3. 호모우시온 1) homousion 2) 아리우스파에 대항한 삼위일체 3) 호모우시온 homousion vs 호모이우시온 homoiusion 의 차이 삼위일체 vs 삼위 유사 |
22장 율리아누스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하다
율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동생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정변 속 살아남은 두 아들중 하나. 콘스탄티우스의 자비로 피살된 카이사르 갈루스의 동생 군인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다. 내전을 앞두고 페르시아 원정길에 병사한 콘스탄티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번째 단독 황제가 되다 |
23장 율리아누스의 단명한 재위
24장 율리아누스의 퇴각과 죽음
나는 분명 저자가 단정한 평가를 받아들이며 읽는게 이 책의 재미이자 장점이라고 말해왔다.
그렇기에 15장에 저자가 보인 ' 초기'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이 거북살스러웠다.
저자는 확실히 율리우스, 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배교자' 곧 다신교숭배자에게는 너무도 호의적이다.
야심, 모순, 허영이란 단어를 쓰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 황제의 모든 행적에 대해 찬탄과 동정이 가득해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도 그렇다!
율리아누스의 불행한 과거,
그의 성실한 실천력,
그의 학문을 사랑하는 태도,
관대한 포용력,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 등등
그는 종교를 떠나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등장한 그 많은 인물들보다 훨씬 비중있게 등장시킨 거다.
로마제국 역사에서 그 중요한 콘스탄티누스보다 훨씬 세밀한 행적이 기록되어있다.
어찌되었건 율리아누스의 사망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볼 만했다.
페르시아 원정을 획책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오만에서 나온 실책의 결정판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그 실책을 빨리 깨닫고 퇴각을 결정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퇴각길이 그에게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무엇보다 후임황제로 인해 그가 사랑한 로마 제국과 백성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길이 되었다는 것.
후임황제 요비아누스 -페르시아와 굴욕적인 강화조약 - 니시비스 싱가라 양도 - 티그리스 너머 5개주 양도 |
25장 요비아누스와 발렌티아누스, 그리고 제국의 분할
26장 훈족의 이동과 고트족의 위협
1. 요비아누스 : 재위기간 8개월. 요절 2. 로마군 발렌티아누스 옹립 3. 발렌티아누스 , 동생 발렌스 황제 발탁 4. 동서제국의 분할 4-1. 서로마 : 발렌티아누스 일리리쿰, 이탈리아, 갈리아 밀라노 행궁 4-2 . 동로마 : 발렌스 도나우강 하류~ 페르시아 접경지대. 콘스탄티노플 5. 발렌티아누스의 사망 5-1. 첫아들 그라티아누스 황제 5-2. 둘째아들 발렌티아누스 2세 황제 5-3. 동생 발렌스 황제 6. 발렌스 황제 사망, 테오도시우스 황제 발탁 7. 테오도시우스 황제 - 발렌스 통치지역 승계 : 트라키아, 아시아, 이집트 , 일리리쿰, 다키아, 마케도니아 추가. - 훈족에 쫓겨 남하하는 대고트족 정책 : 회유와 정착 - 국방 경계 강화, 제국내 평화유지 8. 제국을 위협하는 바바리안들 8-1 ) 스키티아 : 타타르족. 무르사 (족장) 칸( 최고지도자) 8-2) 훈족 : 흉노족 탄족(족장) 기타 : 몽골족, 만주족. 9. 하드리아노플 전투 - 발렌스의 고트족 정벌전쟁 - 발렌스 황제의 전사, 4만 보병 학살. " 하지만 하드리아노플 전투는 어느 하루의 전투에서 고트족이 승리하고, 로마인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영향을 바바리안과 로마인의 정신에 끼쳤다. 훈족이 고트족에게 불러일으킨 공포심을 , 이제 고트족이 로마제국의 백성과 군인들 사이에 불러일으킨 것이다. "(p 421) |
● 하지만 역사가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나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p412)
● 인간은 자연재해에 대한 걱정보다는 동료인간들의 소행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p412)
3권
27장 테오도시우스 17년 통치
1. 그라티우스의 몰락 -브리타니아 군대 막시무스의 반란. -테오도시우스 (동로마) + 막시무스 (서로마)+ 발렌티누스 2세 3황시대 2.태오도시우스 기독교정책 2-1. 아리우스파 척결 2-2.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개최, 삼위일체교리 확정 3. 테오도시우스의 내전 3-1.막시무스로부터 발렌티누스 2세 황제 구출 3-2. 에우게니우스 황제 3-3.아르보가스테스와 에우게니우스 황제 진압 4. 테오도시우스 사후 4-1. 큰아들 아리카디우스 :동로마 4-2. 작은아들 호노리우스 :서로마제국 |
28장 다신교 우상의 파괴와 기독교의 성몰 숭배
이 장은 앞서 테오도시우스의 종교정책과 연결할 수도 있지만 가톨릭교회의 기독교 변질 현황을 보다 세밀히 살펴볼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콘스탄디누스의기독교 승인 이후 로마황제들이 앞장서 다신교를 억압해오다. 가장 최선봉에서 효과적으로 다신교를 제압한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다신교 원로원에 승리의 여신상 제거. 다신교 희생제의 금지. |
이제 로마제국은 기독교 단일신의 세상이 되었다.
나는 구교 (카톨릭과 그리스정교회) 에서의 성인숭배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모숭배도 마찬가지고.
성경에 성모와 성인들이 예수에 복종하고 어떻게 섬겨왔는지 증거되어있음을 버젓이 알만한 사람들이 어떻게
'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성인들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늘 의문이었다.
그러다 오늘 여기 28장 성자들의 신화 숭배 과정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만약 5세기 초에 테르톨리아누스나 락탄티우스가 환생하여 올부 대중적 성인과 순교자의 축제를 참관했더라면 , 그들은 기독교의 순수하고 정신적인 예배에 왜 저런 신성모독의 광경이 도입되었느냐고 하면서 경악과 분노를 표시했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향료의 연기, 꽂들의 향기, 램프와 촛불의 불꽂에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p449)
"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그들이 그토록 파괴하고 싶어했던 다신교의 신성모독적 모델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p450)
29장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과 충신 스틸리코
30장 고트족의 반란과 스틸리코의 진압
● 로마의 정신은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죽어버렸다.(p451)
1. 아르카디우스 동로마황제와 호노리우스 서로마황제 2.스틸리코 : 선임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충신 이자 사위 -동로마와 서로마의 중재자 3.스틸리코와 동로마의 결별 4.스틸리코의 활약 4-1. 폭군 길도 제압(AD 398) 4-2.고트족 알라리크 격퇴 ( AD 403) 4-3.고트족 라다가이수스 침공 격퇴 5.스틸리코의 몰락과 가속화된 서로마 멸망 |
" 후대사람들은 젊은 날의 보호자이며 국가의 동량이었던 은인에게 그런 배은망덕을 저지른 호노리우스를 아예 사람취급하지 않으려했다.
그런 자를 비난하는 것조차 아까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p471)
31장 고트족의 로마 약탈과 알라리크의 죽음
호노리우스 서로마 황제 황궁은 라벤나로. 로마엔 시장과 원로원이 남은 상태. 은인이자 제국의 대들보 스틸리코를 숙청한 후 스틸리코 지지세력이었던 로마장수들 동반 숙청. 이로 인해3만명의 로마군 병력 손실. 고트족 알라리크의 로마침공 로마의 국가 성립이후 1163년만에 처음 겪는 참화 (p475) 알라리크 사후 불안정한 고트정 정치세력. 그틈에 독립한 브리타니아 |
32장 동로마제국의상황: 아르카디우스,에우트로피우스,테오도시우스2세
동로마제국은 아르카디우스의 통치시기에서 투르크족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1058년 동안 초창기의 부패상태를 항구적으로 간직한 채 존속했다.(p486)
서로마제국의 로마가 유린될 때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서로마제국 황제의 형 아르카디우스.
1.동로마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 1-1.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 좌지우지 1-2. 황우 에우독시아 2.아르카디우스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 (로마를 침공한 알라리크의 동생도 테오도시우스의 딸과 결혼하여 그 아들 이름을 테오도시우스라 지었다) 2-1 .테오도시우스의 누나 폴케리아 2-2. 테오도시우스의 황후 에우도키아 2-3 페르시아와 불공정한 조약체결 : 아르메니아 분할 할양 |
33장 반달족의 아프리카 점령
계속해서 쪼그라드는 제국 판데기!
앞서 32장에서 가장 먼 속주 브리타니아의 탈락이 나왔다.
페르시아에 아르메니마까지 빼앗긴 사정이야 뭐...
그리고 이젠 아프리카.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차지할려고 로마가 그 무슨 개고생을 해왔는데 ㄷㄷㄷ
반달족에 빼앗기는 데 기여한 로마 두 위대한 장군들의 반목.
정확히는 아이티우스의 농간에 의한 라이벌제거 시도때문이다.
보니파키우스.
신실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벗.
☆ 동굴로 간 일곱사람 설화
'200년동안 잠을 자고 난 뒤에, 두 중요한 시대의 시간 간격이 일거에 단축되어 새로운 세계를 구세계의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데키우스의 통치에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이르는 2세기처럼 더 극적인 무대는 없으리라.
그 200년의 세월동안 제국의 수도가 바뀌었다.
군인정신은 타락하여 굴종적인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
로마제국의 일치단합은 해체되었고 그 정신은 땅바닥에 떨어졌다.'(p510)
34장 훈족의 왕 아틸라
아프리카를 빼앗긴 일로 모처럼 재회하는 동로마와 서로마.
그러나 반달족 왕 겐세리크의 책략으로 훈족은 동로마 뒤통수를 침
아틸라가 그 훈족의 왕
여기서 또 저자 기본이 보여주는 두 가지 촌극.
훈족 포로가 되었다가 인생역전한 노예
그와 함께 로마에 대해 찬반 토론을 벌이는 역사가 프리스쿠스
결국 이 노예출신 자유민의 로마 비판은 로마에 대한 애도로 전환되었더라고.
훈족의 막강한 왕이 그렇게 부러워했던 로마제국의 수준높은 문명과 특히 문자.
35장 아틸라의 갈리아 침략 및 이탈리아 침략
풍전등화의 로마
1.훈족왕 아틸라가 이번엔 서로마를 침공하다. 발렌티니아누스의 굴욕적 조약과 훈족 진영내 전영병으로 퇴각. 2.야비한 책략가에서 공화국의 수호자로 경쟁자이자 신실한 장군 보타니아스를 죽게하고 제국의 아프리카손실까지 끼친 간악한 자인줄 알았더니 그래도 로마를 위해 정력적으로 싸운 노장 아이티우스 아틸라의 로마침공에 막아내다. 3.서로마황제 발렌티니아누스의 황음 - 황제로서의 권위가 전혀없는 비겁한 왕 - 충신 아이티우스 제거. - 추악한 욕망으로 내부에서 피살당함 4. 제국의 분해 -스페인 :수에비족 - 갈리아 남서부 : 서고트족 -갈리아 북동부 : 메로빙거 왕가의 프랑크족 - 북아프리카 : 반달족 |
●모든 인간이 자신처럼 우정과 감사를 모르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황제는 죽은 아이티우스의 가신과 추종자들을 자신의 경비병으로 채용했다.
(p528)
●설라 로마가 살아남는다해도 자유, 미덕, 명예는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p529)
36장 서로마제국의 멸망
그 유명한 오도아케르란 이름을 이제 만났는데
서로마 멸망의 양상은 막상 심심하다.
서로마제국은 진즉부터 권한,위엄, 제국의 사이즈도 비리비리했다.
그리고 고트족에 의해 이어 반달족에 의해 로마시는 만신창이처럼 유린되었고.
그러함에도 원로원과 제위의 형식은 남아있었다.
황제 자리는20년 사이에 숱하게 갈리고 나라의 명운이 바바리안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니 서로마 원로원 이 1000년의 기구가 결단을 내린거다.
서로마에 황제 따로 필요 없고 동로마 황제 너거가 다 해 무라~
그러니까 서로마는 망한 게 아니다!
원래 로마는 하나었으니까!
이런 정신승리가 가능한 결정도 로마제국 1000년의 힘이 아닐까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는 말이 연상되었다.
1.발렌티아누스3세에서 아우구스툴르스까지 막시무스 -아비투스 -마요리아누스-리비우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올리브리우스-글리세리우스 -네포스- 아우구스툴르스 2.로마 혹은 이탈리아의 세력자 바바리안 2-1. 리키메르 2-2. 오레스테르 2-3. 오도아케르 3.오도아케르 : 서로마의 명목상의 행정 책임자 실질적인 왕 |
37장 수도자 생활의 발달과 야만인들의 개종
-인간성의 탐구에도 흥미롭고 또 로마제국의 쇠망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두 가지 종교적 사건 (p553)
1.수도원의 폭발적 증가 : 제국의 압제를 피한 도피처. 이로인한 로마제국군의 전력감소 (이건 쫌 작가의 억지다! 특정 군단이 아예 말소되거나 집약적인 소멸이 있었다면 모를까 제국 전역에서 장기간에 벌어진 일을 전력감소라고 굳이 기독교 탓을 할수 있을까 군 전력 감소와 수도원인구증가는 별개의 상황이라고 봐야겠지. 즉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둘다 다른 사유에서 유래된 독립된 팩트라는 거!) 2. 스페인의 유별난 유대인 박해 이건 볼테르의 캉디드나 마이산(토마스 만) 에서나 나온 모습이라 익숙하다. 스페인에 유대인공동체가 많았던 탓에 이 광기의 시대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족속 유대인. 3.서로마 멸망 후 기독교 판세 아프리카(반달족) : 아리우스파 이탈리아(동고트): 아리우스파 갈리아 (프랑크족): 가톨릭 스페인 (서고트) : 가톨릭 |
38장 서로마 멸망 이후의 서유럽 상황
1.메로빙거 왕조의 성립 (갈리아 , 프랑크족) 1-1. 알라마니 족과 고트족 제압 1-2. 그의 전승을 가능케한 기독교의 기적들 1-3. 로마 집정관과 아우구스투스 칭호 수여 1-4. 살리카 법전 제정 2. 스페인 2-1. 고트족 왕국 + 수에비족 왕국(오늘날 스페인 조상) 3. 브리타니아 3-1. 색슨족들의 시속적인 침략 3-2. 색슨족, 앵글족, 기타 다수 3-3. 브리타니아 = 바바리안 점령지대 + 본토 웨일스 3-4 .아서왕 :브리타니아의 사우스웨일수 실루어족 통치자 4.아서왕 전설의 생산과 유통 4-1. 웨일스와 아르모리카의 음유시인 -> 노르만족 역사가 4-2. 몬마우스의 제프리 라틴어 버전+ 12세기 기사도 정신 차용 +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 마법사 멀린 + 용+ 요정 5.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관한 개관 " 로마제국의 멸망스토리는 간단하고 명백하다. 왜 로마제국이 멸망했느냐고 그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런 대제국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해야 마땅하다.(p584) |
이상 제3권 끝
4권
39장 이탈리아의 고트족 왕국
1. 오도아케르를 물리친 테오도리크 왕
- 관용으로 종교와 정치의 평화 구축
※ 「철학의 위안」 (보이티우스)
테오도리크 왕의 총애를 잃고 감금중 저술.
: 시카고플랜 7년차 100번
40장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1.유스티니아누스의 외형적 활동 1-1.비단 수입 1-2.소피아 대성당 건축 1-3. 요새와 성벽의 건설 1-4.아테네 학당과 집정관직 폐지 2. 황제의 로맨스 :창녀 테아도라의 입지전적 성공스토리 |
41장 유스티니아누스의 정복과 벨리사리우스의 성품
세계사 시간에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이름이 강조된 진짜 이유
1. 로마제국 속주 회복 1-1. 트리폴리, 렙티스, 키르타, 카이사레아, 사르데나 5래주 사령부 건립 2.서로마제국 영토회복 : 고트족 왕 비티게스 생포 3.벨리사리우스 -안토니나 포티우스 (의붓아들) 테오도시우스 : 안토니나의 정부 아내의 불륜, 황제의 의심 속에서도 신의와 충성을 버리지 않았던 영웅 |
42장 바바리안 세계의 상태
1. 도나우강 상류 1-1. 게피다이족 : 상헝가리. 트란실바니아 1-2. 랑고바르드족: 게피다이족 대체 2.슬라브족 - 불라기아 족과 동류 -불가리아족 : 서로마와 그리스 침탈 3.투르크족 - 알타이 산맥 일대 장악, 200년 치세 - 베르테제나 칸 4. 오고르족 -티서강 거주 -투르크에 학살되고 남은 종족들은 캅카스지대 정착 -아바르족 대체 -유스티니아누스와 평화협정 5.페르시아 - 호스로 황제 안티오크 정복 |
43장 벨리사리우스의 몰락과 유스티니아누스의 죽음
1. 유스티니아누스의 벨라리우스 견제로 인한 전술실패 1-1. 고트족 전멸과 로마회복 문전에서 벨리사리우스 복귀 1-2. 슬라브족으로부타 콘스탄티노플 방어 2. 로마 유적을 지켜낸 벨리사리우스 (+ 로마 탈환과 재침탈의 연속인 로마) 2-1. 고트족의 로마탈환 2-2.10000의 토틸라 군대 이탈리아 침공 2-3. 로마지휘관 베사스의 이탈로 로마입성 성공 2-4. 토틸라 로마성벽파괴 2-5. 유적까지 파괴하려는 것을 벨리사리우스가 저지 3.죽기 직전까지 벨리사리우스를 모욕한 유스티니아누스 -벨리사리우스 최후의 사면 - 유스티니아누스 제위 38년에 사망 |
44장 로마의 법률사상
유스티니아누스의 제위시절 최고의 업적은 로마범 집대성과 편찬
1.로마의 법률의 역사 1-1. 12조항 1-2. 「항구포고령」 1-3. 그레고리우스법, 헤르모게니아누스법, 테오도시우스법 2.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편찬 2-1. 트리보니아누스 담당. 2-2. 「로마법전」-> 「로마법제요」-> 「로마법 대전> :「로마법제요」는 「로마법대전」의 축약본 2-3. 「로마법제요」 =민권범+물권법+형사소송법+형법 3. 유스티니아누스 「로마범제요」 민권법 3-1. 부권의 법률적 인정 3-2. 영아살해 금지 3-3. 여성권 부정 3-4. 이혼제도 4. 유스티니아누스 「로마법제요」 형법 4-1.사적 보복 행위 금지 4-2. 동성애 금지 |
45장 랑고바르드족 지배하의 이탈리아
● 도덕적 죄, 악행, 범죄는 신학, 윤리학, 법학의 탐구 대상이다.
이 세 학문이 서로 동의할 때 그들은 협력한다. (p 676)
● 우리시대에 만연한 법률의 남용을 지커보고 있노라면,울화가 치밀고 때로는 이런 정교한 법률체계를 걷어치우고 투르크 재판관의 간단명료한 즉결처분에 맡기고 싶은 생각마저 갖게 한다. (p679)
● 물론 이런 절차와 지체가 시민의 인권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단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재판의 재량권은 독재의 첫 번째 도구였다.(p679)
1. 동로마(=비잔틴제국)상황 1-1.유스티니아누스 사후 유스티누스 등극 1-2. 유스티누스-> 티베리우스 양위 1-3.마우리키우스 등극 2. 이탈리아 2-1. 라벤나의 총독부(동로마령)+ 롬바르디아왕국(랑고바르드족) 2-2. 로마시 : 교황그레고리우스1세가 지휘 3.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3-1. 카톨릭 교회의 전형 구축 3-2. 교구배정,달력 축일 지정, 행렬순서, 집전의식, 사제복 지정 등 |
46장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갈등
1.유럽 - 랑고바르드족 떠나고 게피다이족 몰락 - 아바르족의도나우 점령 -아바르족 바이안 치세 2.동로마 -마우리키우스 반란으로 실각 -찬탈자 포카스 황제도 곧 실각 -헤라클리우스 동로마황제 등극 3.페르시아 - 호스로2세의 확장 -예루살렘 파괴하고 기독교인 학살 4.헤라클리우스와 호스로2세의 격돌 -교회로부터 군비 대출 -헤라클리우스 빼앗겼던 속주들 회복 -예루살렘 수복 & 포로 해방 |
47장 교회내의 교리논쟁
1.에비온파 : 유대인기독교도 : 기독교내유대율법고수& 성육신 부정 2. 도케테스파 :성육신 부정 , 예수의 인성 부정 : 그리스도 가현(도케스)주장 3.케린투스파 :신성과 양성의 기계론적 융합 주장 4.아폴리나리우스파 :그리스도의 인성=육체+ 영혼+ 로고스 |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진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며, 우리와 똑같은 성질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4.4대종교회논점 요약 4-1. 니케아종교회의(325) -그리스도는 하나님 4-2. 콘스탄티노플종교회의(381)-그리스도는 참 인간 4-3. 에페소스 종교회의(431)-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 4-4.칼케돈 종교회의(451)-그리스도의 본성은 둘 |
따라서 정통파의 교리를 한 문장으로 서술하면 이렇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참인간이며 그분히 본성은 신성과 인성의 두 가지로 되어 있으며 하나의 인격 속으로 통합되어 있다.(p728)
5. 네스토리우스파 -페르시아에서 생존 -박트리아, 훈족, 페르시아, 인도인, 페르사르메니아인, 메디아, 엘람인들에 전도. -페르시아만~ 카스피해 -인도 마드라스 해안 네리우스파: 포르투갈 지배기간 압제를 받다 네덜란드 진출 후 자유회복 6.단성파 -야코부스 바라다이우스에 의해 부흥 -시리아, 이집ㅌ, 에티오피아 -엄격한 고행과 수도원 생활 위주 7.마론파 -단의론파 8.아르메니아인 -에우티케스 추종 9. 콥트파 혹은 이집트인 -단성파 추종 10.누비아인 -단성파 추종 후에 이슬람 수용 11. 아비시니아 -동로마영향권 -단성파 추종 |
5권
48장 비잔티움 황제들의 계보와 성격
"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800년이라는 긴 세월 가운데 처음 400년 동안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가 역사의 희미한 빛이 드문드문 새어 들어왔다.
마우리키우스부터 알렉시우스에 이르는 역대 황제의 생애중에서 마케도니아 황가를 일으킨 바실리우스는 따로 떼어내어 살펴볼 만하다."(p744)
1.로마제국 역사에 등장하는 외부민족 1) 프랑크족 -샤를마뉴 : 프랑스, 인잘리마, 독일 지배 2)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3) 라틴인 : 서방 민족들로 구성 4)그리스인 :콘스탄티노플 지배세력으로 성장 5) 몽골족, 타타르족 : 6) 투르크족 -셀주크 투르크 :옥수스~안티오크~ 니케아 지배 -오스만 투르크 :동로마제국 정복 2.비잔티움 황실의 명망있는 계보들 1)헤라클리우스 :5대 2)이사우리아 :4대 3)아모리아:3대 4)바실리우스:6대 5)콤네무스:4대 3. 이사우리아 왕가 -성상파괴운동에 깊이 연루 1) 레오3세 > 콘스탄티누스5세 > 4. 콤네누스 왕가 "콘스탄티노플과 트레비존드의 마지막 왕조의 융성"(p752) 1) 알렉시우스 황제 : 황녀 안나 콤네나 |
● 그들의 시야는 좁았고 판단력은 허술하거나 왜곡되어있었다.(p744)
● 그리하여 역사를 경험하는 것은 지적 안목의 지평을 높이고 넓혀준다 (p748)
● 며칠동안 글을 쓰거나 몇시간 동안 책을 읽는 사이에 , 역사의 600년은 가뭇없이 흘러가고 인생이나 통치의 기간은 덧없이 지나가는 순간으로 축소된다.(p748)
49장 성상 파괴 운동과 프랑크족의 이탈리아 정복
1.성상숭배의 시작 :문맹자의 전도와 다신교문화의 침투속에 허용 : 무릎 꿇기, 등불, 향 피우기 :6세기 안착 - 아리우스파만 배격 2.레오3세의 성상파괴운동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 성상숭배 배격 선언 -로마교황의 격렬한 거부로 성상숭배 지속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가 성상숭배회복 : 니케아 종교회의 3.로마 교황과 프랑크족의 결탁 1)로마교황의 독자노선 2) 프랑크족 카롤링거 가문 샤를마뉴에게 프랑스왕 , 로마귀족 수여 3) 피핀 샤를마뉴 신성로마황제수등극 4.샤를마뉴의 후계자들 1)독일왕국 : 비만왕 카를 2)프랑스왕국 : 로타르 3) 이탈리아 : 루이2세 5. 독일(프랑크제국)의 성장과 유린되는 교황직 1) 교황 선출과 인정권을 두고 로마에 영향력행세 2) 창녀 마로치아와 테오도라의 후손이 장악함 로마 교황직 3) 그레고리우스7세의 교황직 개혁 -추기경단의 선거로 교황직 선출 |
50장 마호메트와 이슬람교의 발전
1.이슬람 세력의 두 유력가문 1) 하심 : 마호메트 출신가문 후에 아바스왕조 설립 2) 쿠바라시: 무아위야 왕조 설립 2.무슬림의 분열 1) 시아파 : 마호메트와 알리 숭배 초록색 터번 - 무아위야 왕조 아바스 왕조에 멸망 2) 수니파 :마호메트-아부바르크- 우마르-오스만- 알리 계보 인정 |
51장 아랍인의 세계 정복 :페르시아, 시리아 ,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
1.페르시아 정복(633~651) 1) 칼리프 왈리드와 할리드 사령관 2.시리아 정복(633~639) 1) 아부바르크와 헤라클리우스의 격돌 2) 할리드 사령관의 승리 , 다마스쿠스 상실 3.이집트 정복(639~641) 1) 사령관 암루, 칼리프 우마르 2) 단성파 (콥트)기독교도들의 협력 4.북아프리카(647~709) 1) 칼리프 무아위야 사령관 아크바 5.스페인 1) 사령관 타리크와 사령관 무사 2) 박해받던 유대인의 협력 6. 이슬람교의 확산 1) 페르시아 , 북아프리카, 인도 2) 스페인- 모즈아랍; 기독교도+ 무슬림문화 |
52장 아랍인의 실패한 정복 사업:콘스탄티노플과 프랑스
1.동로마 1) 콘스탄티누스4세와 무아위야 칼리프 2) 칼리프 술라이만의 2차침공도 실패 2.프랑스 1) 마르텔 카를의 활약 3. 로마 -교황 레오4세의 활약 4.무슬림 세계 1) 파티마족 : 마호메트의 딸, 초록색터번 => 카이로에 파티마 왕조 2)우마이야족 : 마호메트의 적대가문 쿠라이사후계자들 , 하얀색 터번 =>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설립 3) 아바스족 : 마호메트의 숙부.하심가문 출신, 알리 후계자들, 검은색 터번 => 바그다드에 아바스 왕조 5. 무슬림 제국의 멸망 원인 1)용병들의 발호 2) 카르마트 파와의 내분 3)속주 사령관들의 제국이탈 |
53장 동로마제국의 운명
1.쪼그라든 제국과 군관구 제도의 새 행정제도 1) 메소포타미아 군관구(테마): 유프라데스 서쪽 2) 시칠리아 군관구 : 칼라브리아 3)롬바르디아 테마: 베네벤툼 공작령 4) 니케포루스, 요한네스 치미스케스, 버실리우스2세 :아라비아제국 영토-> 투르크족 5) 킬리기아, 안티오크; 크레타섬, 키프로스 6) 이탈리아 남단 -> 노르만족에게 빼앗김 7) 불가리아 지역 2.새로운 황실 등급 데스포트> 세바스토크라토르> 카이사르> 판히베르세바스토스> 프로토세바스토스 3.리우트프란드 프랑크 사절의 동로마황실 의전 경험서 4.라티어의소멸과 그리스어의 득세 5 .콘스탄티노플 도서관 |
54장 파울리칸의 근원과 교리
1.8세기까지의 기독교 상황 1)7 세기 : 여전한 교리전쟁 2)8세기 :6차 종교회의의 안착과 평화 (성상부정한 종교회의는 7차, 이후 8차에 다시 인정) 3) 그노시스파와 마르키온파 : 그노시스파에 영향받은 마르키온파가 마니파에 흡수 2.파울리칸 1) 예수는 공로에 의해 그리스도가 된 것 2) 성모와 성상 숭배 거부 3)구약 거부 4)소아시아일대에서 종교전쟁 일으킴 -바실리우스 황제의 의해 진압됨 3.파울리칸의 영향 1) 헝가리,프랑스 , 게르만 지역 , 베네치아 내 포교활동 2) 교황 인노켄티우스3세의 종교재판으로 전멸 |
55장 불가리아인,헝가리인, 러시아인
1.불가리아인 -9~10세기경 도나우강 남부 지배 - 바실리우스 2세의 잔혹한 학살로부터 생존 2.헝가리인 - 900년대 유럽침투 - 마자르족으로 불림 3.러시아인 -스칸디나비아 노르만족의 후예 -류리크 왕조 -957년 올가 공녀 세례 -989년 블라디미르 , 바르실리우스 황제의 여동생과 혼인하며 기독교로 개종 4.북유럽의 기독교 정착 -9세기~11세기 - 불가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섹슨. 댄마크,노르웨이, 폴란드, 러시아 |
56장 사라센인,프랑크인, 노르만인
1.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플리아,칼라브리아), 시칠리아 - 그리스인, 사라센인, 프랑크인의 민족적 격전장 2. 베네벤툼의 롬바르디아(프랑크족 지배) - 베베벤툼+ 살레르노+ 카푸아공국으로 분열 - 사라센의 침입 3.노르만인의 등장 -1016년 노르만족의 시칠리 침공 -노르망디 공작 긴속교 개종 -롤로의 기독교 정책 -1940 년 노르만족의 나폴리(풀리아) 침략 4.노르만족의 나폴리 왕국 -노르마족 루지에르 백작 시칠리아 정복 -로베르공의 로마탈환과 그레고리우스 교황 복위 5.노르망디 왕조의 몰락 -루지에로 1세의 실정 -게르만족 하인리히6세 시칠리 침공 -노르망디 공국 통치권은 최종 잉글랜드로 |
57장 셀주크 왕조의 투르크족
1.가즈나 왕조 수브크디킨 -> 마흐무드-> 마수드 :단다나칸 전투로 멸망, 셀주크 왕조로 대체 2.셀주크 왕조 -셀주크 -> 미카일-> 토그릴 베그 -> 알프 아르슬란-> 말리크 샤 => 케르만 왕조+ 시리아 왕조 + 룸왕조로 분열 2-1. 토그릴 베그 -가즈나왕조 축출 -부와이 왕조 멸망 -이라크 정복 - 메디아(아제르바이잔)정복 -동로마 침략 2-2. 알프 아르슬란 - 동로마 로마누스 황제 생포 2-3 .술라이만의 룸 왕조 -안티오크 점령 3.예루살렘의 수모 1) 우마르 칼리프에게 점령 2) 셀주크 왕조의 오르토크 부족장의 예루살렘 학정 3) 하킴( 파티마왕조) 의 신성모독과 기독교박해 |
제6권
58장 십자군 전쟁 1
1.은수사 피에르와 교황 우르바누스 2세 2.플라켄티아 종교회의와 클레르몽 2차 종교회의 - 성지 탈환과 십자군 거병 승인 3.십자군 지원순례단의 몰락 1) 우르바누스2세의전대사 선포 2) 광신과 전투욕, 세속법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 오합지졸들 3) 헝가리와 불가리아로부터 1차 진압 4)동로마로 피신한 무리들 5) 술라이만에 의해 2차 몰살 4.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군주들 1) 부용의 고드프루아 2) 베르망두아 백작 휴 3)로베르 노르망디공작 4) 스티븐 백작 (사르트르, 블루아, 투루아) 5) 아드마르 : 퓌의 주교 6) 레몽도 툴르즈 백족 7) 보에몽(로버르 기스가르의 아들) 8) 탕그레드 5.전과 1) 비티니아 평원 집결 2) 니케아 수복( 1097년 5월 14일~6월2일) 3) 안티오크 함락(1097년 10월 21일~1098년 6월 3일) 4) 예루살렘 정복 (1099년 6월7일~7월 15일) 6.고드프루아, 예루살렘의 첫번째 프랑크 왕 - 예루살렘 왕국 법전 선포 |
59장 십자군 전쟁2
1.1차십자군 전쟁의 의의 - 동로마제국의 멸망 지연 - 십자군에 휩쓸린 투르크 축출, 속지 회복 -셀주크 룸 왕조의 약화 2.2차 십자군 전쟁 -콘라트 3세, 루이7세 - 당시 동로마 마누엘 콤네누스 황제 -동로마황제들의 배격과 비협조 -다마스쿠스 포위공격 실패 3.3차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 수복 목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1세 황제 지휘 -동로마 이사키우스 앙겔루스 황제 : 살라딘과 비밀협정 -원정 실패, 바르바로사 황제 익사 4.십자군 원정을 부추긴 성직자들 1) 베르나르 클레르몽 수도원장 2) 교황 인도켄티우스2세, 에오게니우스 3세 5.이방의 지배자들 1) 사라센족 : 아바스 왕조의 누레딘 왕 2)쿠르드족 :살라딘. 누레딘의 사라센 영토 장악 6.사자왕 리차드와 살라딘의 협정 - 예루살렘을 건 지리한 전쟁 - 예루살렘 전쟁후 각자 권력 상실 7.4차 십자군 전쟁 -교황 인노켄타우스 3세 -시리아까지 진군했다가 비잔티움 제국 정복 (1203년) 8.5차 십자군 전쟁(1229년 3월 18일) - 교황 인노켄다우스 3세 - 이집트 침공 9.프리드리히 2세의 예루살렘 입성 -예루살렘 내에서 이슬람과 평화공존 도모 10.6차 십자군 전쟁(1248~1254) -프랑스 루이9세 11.7차 십자군 전쟁 - 튀니스 공격중 루이9세 사망 |
60장 동서교회의 분열과 제4차 십자군
1.분열의 전조증상 1) 니케아신경에 추가된 새로운 교리 2) 필리오케 : 그리고 아들로부터 - 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발현됨 -갈리아교회의 주장과 동방교회의 반발 2.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패권다툼 - 케롤라리우스에 로마교황의 파문선고( 1054년 7월 16일) 3. 1~3차 십자군 원정 -십자군 순례단과 원정군의 무례함과 난폭함 -동방제국민의 적대감 -마누엘콤네우스 실각후 학살당한 2차 십자군단 4.4차 십자군단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함락 -세 차례 대화제로 콘스탄티노플 참화 |
"여기서 비잔티움 사람들이 오랫동안 라틴인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은 사례를 한번 짚어 보자.........주교들은 교회의 신랑으로서 여러개의 반지를 꼈다.사제들은 얼굴의 수염을 깎고 , 한차례 물에 몸을 담그는 식으로 세례를 주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이 열심히 비판하고, 라틴 교회의 박사들이 그에 못지않게 열렬히 변명한 범죄행위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사소한 것이었다."(p962)
61장 프랑스인과 베네치아인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1.1204년 콘스탄티노플 점령후 50년만에 퇴각 2.프랑크 문화의 영향 - 인권개념과 생활관련 제도 일부 흡수 -라틴 교부들의 저술이 동방에 소개 3. 라틴 지역내 동로마 문화 영향 -문명기술, 무역 기술등은 받아들임 -그리스 문화와 학문에는 소극적. |
● (십자군 원정 때문에)궁핍에 몰린 귀족들은 자유면장을 남발했다.
노예는 족쇄에서 풀려나고 농부는 경작지를 얻로 장인은 점포를 얻음으로써 공동체에 쓸모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성시 실속과 정신을 되찾았다 .
큰 화재가 숲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키 큰 나무들을 남김없이 태워버리자, 영양 많은 키 작은 나무들이 숨 쉬며 자랄 수 있는 공기와 공간이.생겨난 것이다 . ( p975)
62장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황제들
1.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 황제 (1204~1222) -니케아 2.요한네스 두카스 바타체스(1222~1255) 3. 테오도루스 (1255~1259) 4.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 + 요한네스 라스카리스 -콘스탄티노플 수복 -동서방교회통합시도 -그의 사후 동서방교회 분열 확립 5.안드로니쿠스 팔라이올로구스 63장 잦은 내전과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 1.안드로니쿠스 팔라이올로구스 - 부덕한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 포용 -손자 안드로니쿠스 3세와 내전 2.소안드로니쿠스(안드로니쿠스 3세) - 사보이의 안네 황후와 결혼 3. 요한네스 팔라이올로구스 - 소안드로니쿠스 아들 - 섭정 칸타쿠제누스 4.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 + 요한네스 팔라이올로구스 -마테우스 칸타쿠제누스와 공동 황위 |
내가 학창시절 정말 감동적으로 읽은 대하역사로망 .
이제 동로마제국의 끝자락에 기억에 남는 칸타쿠제네 오스만 투르크의 이름을 만나 반가웠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읽었다.
이 책은 이제 절판되었다.
당시 도서관에서 처음 접했었고 헌책방 순례하다 발견하고 얼른 집으로 모셔온지 십수년이다 ㅎ
책만 모셔놓고 읽지는 않아서 주 무대와 주인공들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단지 여주인공 테아도라와 남주인공 뮤라드에 대한 것만 간직하고 있다.
로마제국쇠망사 다 읽고 나믄 이 책 다시 읽어야겠다
지금 막 책장서 꺼내들었는데 여주인공의아버지가 소안드로니쿠스 였다
책에선 안드로니쿠스 3세로 나온다
64장 빨리 읽고 싶다.
남주인공 뮤라드의 가계와 그 황실이 그립다 ㅎ
64장 몽골과 오스만투르크
"현재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고 있는 오스만제국의 부상과 발전은 근대사의가장 중요한 장면들과 연결되어있는데, 그것은 몽골족의대이동을 예고한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p1009)
; 오스만제국의 발흥이 몽골족의 대이동을 야기했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
1.몽골 테무친(징기즈칸)->오고타이칸-> 귀이크 칸-> 몽케 칸.-> 쿠빌라이 칸 2. 중국침략 - 1210~1214 -1216.재침공 3.남아시아 정복 -호라즘의 술탄 무함마드 격파 -징기즈칸 4.금나라 타도 -오고타이 칸 5.러시아 침공 -아스트라한과 카잔 왕국 침략 -키예프와 모스크바 정복 6.유럽 -폴란드,헝가리 , 독일 -프리드리히 2세의 항전 - 세르비아, 보스니아, 불가리아 침략후 유럽철수 |
"몽골의 몰락은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여 마음껏 발전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p1018)
-몽골이 셀주크 투르크를 휩쓸어버리고
빈사상태의 동로마제국 인근에서 성장한 오스만 제국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
7.오스만 투르크 오스만1세 -> 오르한 ->무라드 1세->바예지드 8.오스만 투르크의 동로마 장악 1 1) 비티니아 침략(오스만1세) 2) 프루사 정복후 제국수도 (오르한) 3) 니케아와 니코메디아 점령(오르한) 4)비티니아 속주 점령(오르한) 5)소아시아 속주 점령(오르한) -이오니아, 리디아, 에페소스, 라오디케아,사르데스 9.오스만투르크의 동로마장악 2 1) 칸타쿠제누스 황제와 전략결혼 (오르한) 2) 케르소네소스 반도 점령.트라키아 요새 차지. (술라이만) 3) 하드리아노플 천도(무라드 1세) 4)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공격 5)도나우강과 유프라테스 강 공격(바예지드) 6)동로마 내전 중재 , 콘스탄티노플 주둔(바예지드) 10. 동로마의 내분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구스 +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구스 VS 안드로니쿠스 팔라이올루스 +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구스 |
65장 몽골족의 정복자 티무르
오스만 투르크 바예지드에게 정복당하기 직전 바예지드를 공략해오는 티무르 .
티무르의 발흥기간만큼 유예된 동로마제국의 멸망
1.티무르 (1335~1405년) -몽골 잔존세력 -차가타이 한국 지배 옥시아나 왕국통일 -페르시아, 타타르, 인도 정복 2.바지예드 오스만 투르크와의 충돌 -오스만의 아나톨리아 수바스 침략 -시리아의 알레포 침략 -다마스쿠스 정복 -아나톨리아침공 : 바예지드 사망, 술레이만 도피 무사의 등극 3.티무르에 대한 평가 1) 침략한 도시들마다 파괴 일색 2) 약탈 일색 3) 트란스옥시아나 왕국과 페르시아의 피폐 4) 창업군주 티무르의 허무한 영광 |
66장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는 비잔티움 황제들
투르크와 티무르의 침략에 동서 단합으로 맞서려는 동로마황제들 1.대안드로니쿠스 -오스만의 비티니아 점령후 로마교황 접촉시도 2.칸타쿠제누스 -교황 클레멘스6세와 접촉 -로마교황과의 만남 시도 3.요한네스팔라이올로구스 -인노켄티우스 6세와 비밀서약 -바티칸에 동로마교회 지휘권과 라틴언어교육 약속 -교황 우르바누스 5세 접견 -동로마황제 필리오케 인정 4.마누엘 팔라이올로구스 황제 - 서방 황제들 방문 -티무르의 발흥으로 투르크 지체하는 동안 평화유지 5.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루구스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 만남 - 종교회의 개최 6.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문예부흥 -비잔티움의 곤란속에 이탈리아로의 이민자들 -피렌체 종교회의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구스)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5세 : 그리스 로마 장서 5000권 수집 -메디치가 -코스모 메디치 , 로렌조 메디치의 활약 |
● 그러나 천재는 성숙의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개인을 교육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백성을 교육시키는 데도 이성과 상상력의 힘이 확대되기에 앞서 먼저 기억에 의한 암기가 있어야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선배들의 작품을 철저하게 모방한 이후에 비로소 그들과 동등해지거나 아니면 그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쌓게 되는 것이다.(p1060)
67장 비잔티움 교회와 라틴교회의 분열
1.피렌체 종교회의에 대한 동로마의 극렬한 반대 ※피렌체종교회 1) 성찬식 누룩 없는 빵 사용문제 합의 2) 연옥 인정 3) 교황의 하나님 대리권 인정 4) 필리오케 인정 (p1056) - 에페소스의 마르코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도 반대 -러시아 이시도레 총대주교 투옥 2.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의 동서통합 노력 - 투르크 침공에 대비한 연합 시도 -라디 슬라우스 , 헝가리와 폴란드의 통합황제 등극 -야노슈 후냐데 -협상의 결렬과 라디슬라우스 황제의 전사 3.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구스 마지막동로마황제의 통합시도 -궁정장관 프란차, 서방의 원조를 위한 출국 - 투르크의 침공으로 모든 시도 종결 |
68장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1. 오스만 투르크 메메드 2세 콘슫산티노플 침공 -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구스 11세 전사 2.생존자들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 피우스2세. 오스만전 시도 -프란차 : 역사가 |
69장 12세기 이후의 로마시 상황
1.12세기 이전 - 제1차 십자군전쟁 이전 - 세계의 수도로써 서방의 경배를 받아온 로마 -로마시민의 서방 황제 무시 2.로마 교황의 권위와 힘 -추기경단의 투표로 선출 - 로마시의 기독교적 가치와 순례자들로 인해 로마교황의 종교적 정신적 권위 3.로마 교황의 수난 1)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 군주제의 창시자 - 추방 2) 칼리스투스 2세 : 로마 시내 개인무기휴대 금지 3) 알렉산데르 3세 :추기경단 선출방식 확정 4)그레고리우스 10세 : 콘클라베 감금으로 교황선출 압박 5)보니파키우스 8세 : 희년과 전대사 선포 -남용되는 희년제도 |
70장 교회 국가의 최종적 확립
1.로마의 변혁을 바라는 계관시인 -페트라르카 -로마의 통일 소망 -리엔초 정부의 몰락으로 좌절 -카를 4세: 로마왕관만 받고 서방으로 퇴장 -아비뇽의 교황 복귀 시도 2. 교황 되찾기에 나선 로마 1) 우르바누스 5세 2) 그레고리우스 11세 -로마인들로부터 교황령 영지 보장 3)교황들의 분열 우르바누스 6세+ 보니파키우스 9세 VS 클레멘스 7세+베네딕투스 13세 4) 파사종교회의로 새 교황들의 대립 알렉산데르 5세 + 요한네스 23세 VS 그레고리우스 12세 (독일, 헝가리, 나폴리)+ 베네딕투스 13세( 스페인) 5) 콘스탄츠 종교회의 :마르티누스 5세 3.교회국가의확립 1) 마르티누스 5세 2) 스페인 편향 안정과 지지 3) 식스투스 5세 - 로마 교황령 정비와 교황청의 안정화 |
71장 대단원
-로마시가 페허가 된 이유
1.세월의 풍화 2.바바리안들과 기독교도의 적대적 공격 - 고트족과 반달족의 침략 - 기독교도들의 우상 파괴 3.자재의 오용과 남용 -바바리안과 기독교도들의 파괴를 피한 일반 건물들 - 아치와 기둥 등 건축자재 재활용 4.로마인의 내분 -내전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요새와 망루들 급조 |
|에필로그|
"로마제국의 쇠망사는 인류의 역사중 가장 장엄할 뿐 아니라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다."(p1115)
" 카이사르들은 교묘한 정책을 수립하여 자유공화국의 이름과 이미지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군사적 전제주의는 로마 사회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기독교의 여러교파들이 흥기하여 로마 사회에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에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것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어 힘이 분산된 것도 쇠망의 한 원인이었다.
게르마니아와 스키티아의 바바리안들이 제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도 변수였다.
민법이 확립됨에 따라 여러 제도가 안정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마호메트의 주도 아래 새로운 종교가 일어나 전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교황들이 정신적 주권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 통치권도 함께 갖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통치아래 서유럽이 제국의 면모를 회복했으나 그의 사후에 붕괴되고 말았다..라틴인들은 동방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사라센과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며 결국 투르크족이 이 도시를 함락시켰고 , 이로인해 그리스 제국은 멸망했다.
중세에 들어와 로마 시는 많은 변모를 거듭했다"
(p1115~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