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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요즘책방 07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혜성처럼 2021. 4. 5. 17:1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Eichmann in Jerusalem』 .Hannah Arendt

 

 

 

 

 

 

 

「역자서문」

 

 

 

 

아렌트에 대한 소개.

우리 나라에는 2000년 초에 부각된 인물이라고.

그랬구나.

청소년용 세계 지성에 대한 이야기 전집 속

「아렌트의 철학 이야기」를 기억한다. 당시 내겐 이름조차 뉴페이스였던 걸로.

이 책이 출판된 계기도 들려준다.

아이히만 책이 불러 일으킨 파장과 그 핵심초점들도.

첫째는 아이히만에게서 한나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 개념.

둘째는 저자 아렌트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

공격의 시발자는 같은 유대인이었다고.

때문에 오늘날에도 아렌트의 저작들은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아예 출판조차 안되고 있다함.

이에 대해 역자 본인도 나서 아렌트를 비판한 이들을 반박.

그러기 위해 아이히만에서 본격 다루어질 주제를 다른 관점에서 끌어와 아렌트이 사상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아렌트가 쓴 「아이히만보고서」 ( 이 책의 원작이 되는)에서 앞으로 독자가 중점적으로 짚어야 할 지점들을 알려주는데 그게 말과 사상의 관계였다.

 

이쯤에서 ‘말과 사상의 관계’에 대한 나의 관점을 추억한다.

내가 기독교에 안착하게 된 여러 계기중에 담임목사님이 집중 설파하신 말과 사상의 문제도 있었다.

당시 내 삶의 화두와 관련된 문제였다.

오랜 방황 끝에 해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근원은 성경이었겠지.

하지만 이걸 고민하던 그 때를 떠올리는 건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내가 생각해온 말에 대해, 행동에 대해, 사람에 대해 이 세계적 정치철학자의 해답은 또 어떠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아직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접견하기 전에 두 번째 관문이 남았다.

정화열 미 무라비언 대 명예교수의

「악의 평범성과 타자 중심적 윤리」 라는 소고가 이어서 붙어있다.

읽다 읽다가 당시 유대인들이 아렌트가 이 ‘악의 평범성’개념으로 아이히만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해를 하는 부분에 이르니 나도 분노가 솟구쳤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그 악이 말이지 꼭 독보적으로 사악해야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유대인들이 , 아니 우리 모두가 알아줬으면 한다는거다.

오늘날 조선일보를 보면서 그 기사에 동조하여 여당을 비판하고 방역정책에 대해 트집을 잡는 행위는 악한 행위다.

더 심한 건 작년 검찰에서 조국 전 법무장관의 낙마를 목표로 장관 청문회 하루 전날 압수수색을 벌인 일을 두고 검찰과 언론과 그 지지자들이 벌인 행태다.

중립을 지켜야 할 법부부 산하 공무원인 검찰이 국회의원의 (국민이 투표로 뽑았다 ) 의정활동을 방해한 셈이다.

이에 언론은 조국 전장관의 일가족의 모든 사생활을 다 드러내고 검찰의 일방적 입장만 기사에 실었다.

반면에 조국 전 장관의 입장과 팩트는 하나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것은 엄연히 국가기관과 언론에 의한 토끼몰이였고 마녀사냥이었다.

조국이란 사람이 이 판에서 잘못한 것은 없었다 .

그는 그저 머리가 좋아 엘리트 계층에 올랐을 뿐이다.

그는 겸손했지만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똑똑했지만 오만하지는 않았다.

그는 기형적으로 정직하다보니 가난의 수렁에 빠진 소위 사학재단이란 것을 운영하는 지역인사의 아들이었을 뿐이고

아내가 장인어른으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을 자신의 사촌동생에게 털어먹힌 경제력면에서는 샌님같이 무능했을 뿐이다.

공부가 취미이고 재능이었던 아버지 조국은 자식에게 공부못한 한을 풀려고 강제할 필요성을 가진 부모는 아니었다.

교수들이 논문 때문에 짬짜미도 하는 와중에 그는 1년 평균 3편의 논물을 써내던 지독한 공부벌레였고 자식은 그런 부모 밑에서 알아서 성실하고 똑똑하게 컸을 뿐이다.

경험과 시야가 부족한 이들은 스카이캐슬에서의 부모와 자식들만 있는 줄 알겠지만 내 은사님네 부녀지간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세상엔 내 기준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니까 아직은 세상이 굴러가고 있는 거다.

추노에서 고을 사또 목을 겨누며 협박하는 이대길한테 송태하가 말한다.

‘이 나라 조선에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원칙을 지키는 관원들이 많다네 ’

그런 집안을 온 국민이 조리돌림하도록 앞장선 언론과 검찰.

마치 625때 공산당 세상에서 완장차고 설치며 그간 잘난 꼴 , 배운 꼴 못봐줘서 아니꼬왔던 못난이들이 진짜 잘난 사람 배운 사람 사형대에 등떠밀던 광경이 떠오른다.

그들의 행위는 그렇게 악했다.

그러나 그 한 사람 , 한 사람을 보자.

그들은 내가 그간 정치기사에서 댓글을 쓴대로 흉측하고 괴랄하고 잔인하고 사이코패스일까?

아니 그들은 그냥 나와 똑같은 대한국인이다.

그냥 그나이, 그 얼굴 그 차림새 그 배움을 가진 평범한 사람.

어쩌면 나와 같은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웃었을 것이고 ,

나와 동향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어느새 한 프레임 안에 갇혀 악랄하고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거.

몰라서 그랬다는 문제가 아니다.

관점의 차이도 아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그 악이 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것이 악인줄 알고 하는 짓거리들이기 때문에 문제인거다

아직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본격적으로 읽기 전이다.

여기서 더 흥분할 일 나올까봐 걱정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By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책에 게재된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법정 모습

 

 

 

제1장 정의의 집

 

재판정 당시 모습. https://youtu.be/Fv6xbeVozhU 으로 가면 총 113개의 공판 장면이  실려 있다.ㄷㄷㄷ

 

아돌프 아이히만.

2차 세계대전당시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부역한 핵심나치당원이 종전 후 18년이 지나 아르헨티나 구석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

아이히만은 이어 신생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한나 아렌트라는 당시 주목받기 시작한 유대인 철학도가 뉴요커라는 잡지사의 의뢰를 받아 재판현장과 전후 상황을 상세히 전한 보고서다.

 

1장은 본서 전권의 서론이기도 하며 총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재판장의 분위기부타 소개한다.

그 재판정의 이름이 " '정의의 집' 이라고 한다.

아마 극장을 개조했는가 보다

특별히 재판을 이끌어가는 판사들의 성향에 대해 많은 설명이 있었다.

한많은 피해자들의 ' 조국‘, 간악한 학살자를 응징하는 극적이고도 유명한 쇼가 벌어질 것이라 기대 받는 그곳에서 재판다운 냉정한 분위기를 잡아 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고 대체로 칭찬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어진 이 장의 포인트 두 가지!

당시 벤구리온 수상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이 이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정치적인 노림수가 있었다는 것과

유대계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역학관계의 진상을 볼 수 있었다는 것 .

우선 두 번째 부분에선 우리 민족도 한많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서도 유대민족처럼 오랜시간 디아스포라로 보내지는 않았어서 그들이 겪은 역사적 아픔을 내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상상 이상일 것이라는 충격 그것이었다 .

그리고 벤구리온 .

곧 이스라엘 국민들이 이 재판을 통해 목표한 것은 나치뿐 아니라 세계가 그간의 역사에서 당한 설음을 설욕하려는 그 것 아니었을지 .

그래서 벤구리온과 이를 대행한 검사측에 대해 동정과 공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난 기독교인이지만 이 바리새인들의 후예에 대한 그간 인류의 폭력은 그것이 기독교라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애초 하나님이 성경으로 정의하신 인간의 속성 때문이었다!

내가 읽은 그 책 제목이 기억 안나는데 디아스포라로 살아내야할 유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준 책이 있다 .

십자군 전쟁동안 살인욕구를 해결해온 사이코패스와 이를 추적한 영민한 처녀 탐정의 이야기인데 ...아 몹쓸 기억력이여 ^^;;;

아무튼 탐욕, 위선, 교만, 무지 그리고 종종 질투와 시기로 인해 특히 서유럽이 그렇게 유대인을 못살게 굴었다 .

그래놓고 거룩한 종교를 빙자했다.

유대인으로 성에 안차서 똑똑한 여성들도 그렇게 불태워죽였다 .

성경에 마녀란 위험인자는 애초에 없었다 .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마녀같은 족속들이 마녀를 창조한 거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사실!

그간에 일본은 과거사를 청산 못했는데 독일은 총리가 예루살렘에 방문도 하고

독일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전범색출도 훌륭히 하니

일본이여 부디 독일을 본받으라

그리하며 서독의 번영을 그리도 축복했었는데 .

당시 독일 내 분위기가 밖으로 알려진것과는 많이 달랐었다니 ...

이제 겨우1장이다

 

제 2장 피고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들여다본다.

그러기 전에 아이히만이 피고라는 점을 인지시키면서

아이히만이 구체적으로 기소된 쟁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모든 기소항목에 대해서 아이히만은 부정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3장에서도 그의 지난날이 다루어질텐데 여기서는 그저 그의 출생과 본격 나치와 관련을 맺기 전까지의 전력만 다루고 있다 .

한마디로 아이히만은 당시 지적 자부심이 높기로 유명한 독일 중산층 가문에서 무능하고 장래가 가망없다 낙인찍힌 골칫덩어리 였나보다.

고등학교 생활은 자세히 언급이 안되었지만 장남인 아이히만을 자퇴를 시켜야 했을 정도로 부모를 크게 실망시켰던 사람이다.

 

이런 걸 보면 우리네 역사와도 겹쳐지는 그림이 있다 .

어린 시절 보았던 대하드라마에사였나?

6•25전후로 매번 나오는 반공드라마들에서 였나?...

하긴 일제시대때도 적용될 수 있겠지 .

평소 못났고 특히나 마을에 큰 해를 끼쳤던 공공의 적 같았던 악당이 부도덕하고 부당한 무력적 권력에 빌붙어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못남을 감추던 모습들.

일제때는 일본순사 앞잡이로 ,6•25 땐 인민군 앞잡이로 호가호위 하면서 평소 잘난꼴을 못견뎌하던 엄한 사람을 감옥으로 ,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는데 앞장서는 사람들 ..

아이히만에 딱 그런 사람 필이 느껴졌달까

 

 

제3장 유대인 문제전문가

 

이 장에선 그런 아이히만의 인생에 유대인의 피가 뿌려져 환했던 꽃길이 그려진다.

어쩌다가 아이히만은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나치에서 승승장구를 한다는데.

나치의 전략이 그랬단다.

적을 알면 백전백'살殺' 이라 했던가?

유대인이 어떤 민족인지를 잘 알아야 할 테니 「유대인의 국가」 「시온주의의 역사」를 읽으라는 제안을 받고 그는 생애 첫 독서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책을 통해 유대인의 이상에 사로잡혀 시온주의를 적극 추종하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그런 적극성과 호의로 유대인 공동체와도 친분을 다져 이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말살하는 정책을 집행하는 일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것!!

아 이 아이히만이란 사람 정말 순진하다 할 정도로 사상과 정신이 박약한 자였구나 ㅜ

 

대학시절 교양세미나 시간이 떠오른다.

페미니즘 관련 참고문헌이 많았음에도 내가 읽은 책은 딱 하나 마르크스 주의의 기계적 페미니즘이던가 그래서,

겨우 그 한 권의 세계관에 경도되어 당시 좌중을 아주 썰렁하게 만들었던 ...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쥐구멍에 숨고 싶고

나란 자를 몹시 자책하게 된다는 거..

때문에 아이히만 이 작자의 그 몹쓸 경박함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된다는 거

 

제 4장 첫 번째 해결책 : 추방

 

재판의 양상은 한 마디로 재판이란 뜻 그대로의 정상적인 재판은 아니었다고.

이유는 피고측과 원고 간에 팩트 제공이 일관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즉 재판이라 하면 양측이 어떤 쟁점적 사실에 대하여 치열한 사실공방을 벌이며 맞다 그르다 규정이 있게 마련인데

특히 원고측에에 제기한 사실들에 대해 피고측이 반박이든 , 인정이든 상보가 되는 맞대응이 없었다는 사정이다.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아이히만의 의견이나 이념이 불분명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유대인 학살의 주역의 지난 일대기 중엔 유대인 수십만명을 탈출 시킨 전력도 있는데 변호인은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장을 읽고 있으면 아이히만은 확실히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란 것을 알겠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자신이 접한 두 권의 책을 정독하면서 마침 히틀러 정권이 요구하는 일을 감당해 낼 수준 만큼은 지적 능력을 키우고 또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적 능력은 단순히 지식의 양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한마디로 나치가 잘 갈아놓은 칼이었을 뿐이다.

나치는 수많은 무기를 갖고 있었고 그 때 그 순간에 아이히만이란 칼이 적재적소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승진과 능력을 인정받음이라는 것으로 착각해서 거기 취해 으스대고 열심을 다해 나치의 기대에 부응하려 했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기능은 한시적이고 협소한 곳에 쓰였다.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나치가 처음부터 유대인들을 완전 말살시키려 든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변덕스런 장단에 아이히만이 점시 놀아났다고나 할까

당의 지령이 유대인의 이주에 국한되었을 때 그의 승진은 확실했다.

나치가 결국 유대인 말살로 정책을 바꾼 뒤로 그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리고 그 시기를 추억하는 아이히만은 무척 우울해하는 것이다.

 

제 5장 두 번째 해결책 수용

 

이 장은 앞서 4장과 뒤를 이을 6장과 함께 주인공 아이히만의 경력 속에서 유대인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아니면 주인공의 경력과 병렬되어 흐른 유대 민족의 비극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를 주인공의 기억과는 별개로 실제 히틀러와 나치 정권하에서의 실상을 증언하는 장이다.

그래서 앞서 추방은 아이히만이 주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여기 수용 장에서는 아이히만이 더는 막힌 승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곧 유대민족의 존망이 오락가락하는 모습과도 일치하는 참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아이히만은 여러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히틀러의 실제 의도와 충돌하여, 아이히만이란 사람은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은 못한 채 자신의 신세한탄만 하며 좌충우돌하는 때이다.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독일은 그 몇 년 사이에 프랑스,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에 자신의 괴뢰정부를 세우면서 유태인 문제를 이들과 함께 다루어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실로 전 서유럽이 유대인 이 하나의 민족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소리다.

그런 서유럽이 유대인 없는 유럽을 꿈꾸었다니.

그러니 유대인들이 2000년간 받은 핍박도 고달픈데 이 2차세계대전 시기에 이렇게 유럽 차원에서 공공의 적 취급을 받었으니 그 한과 설움이 오죽할 까 싶은 거.

그들은 마치 오늘날 전 지구적 환경오염을 궁리하는 모습이랄까?

그들은 도대체 유대인을 왜 그리고 증오했을까?

예수를 죽인 민족이어서?

내가 알게된 유대인들은 그저 평화주의자였다.

하도 핍박당하고 살아온 세월동안 정체성만은 고집하면서도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 그래서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같이 만만하게 취급되어 한마디로 유럽의 동네북이었었나보다!

뭔 일만 생기면 유대인만 붙들고 늘어지는 유럽.

 

6장 최종해결책 : 학살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끔찍하다.

‘최종해결책’이란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획을 담은 그들만의 암호였다.

Final Solution......

<<쉰들러리스트>> 나 『쥐』( 아트 슈피겔만 )에서 보았던 참혹한 장면들이 계속 언급되고 있는데 문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가해자 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 소름이 돋는다는 것....

 

 

 

 

이 장은 아이히만의 경력의 마지막 과정이고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으로까지 와서 재판을 받으며 결국 교수형대에 오르는 결정적 이유가 밝혀질 장이다.

그저 유대인을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추방과 강제수용과 같은 업무적인 일들에서 형법상 최악의 죄목인 살인과 연결되는 일이다.

 

여기사 나는 문득 고민을 되는 거다.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의 법적 효력은 무엇일까?

이는 동시에 (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 뮈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이 무슨 법리적 근거에 의해 치러졌나 하는 질문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에 대해서 한나 아렌트는 속 시원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다.

내가 너무 우문을 한 것일까?

아이히만의 변호사 세르바티우스 박사란 사람이 당시는 전시였고 국가적 행위였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했다.

이 이론에 근거하자면 히틀러부터도 법정에 세울 수 없게 되는 거다.

우리 나라에선 전두환과 노태우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로 부활했다.

틀린 건 알겠는데 왜 틀렸는지 알고 싶다고요 ^^;;;

이걸 누구한테 물어봐야 쓸까? ...

당시 이 전두환노태우 재판당시 필객들 난리가 났었는데 나는 김영삼 정부와 그 사법부에 대한 분노 곧 편도체가 하도 바빠서 전두엽이 파업했었나 보다 ㅋ

당시 신문기사랑 월간지 뒤져봐야긌다.

 

아무튼 여기선 그 문제가 중요한게 아니다.

이 재판에 근거하는 이스라엘 법에 따라 (오늘날 대다수 민주국가에서 취하고 있는 형사법에 따라) 아이히만에게 무슨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지 뒤져보는게 먼저다.

물론 당연히 그런 게 나올 리가 없었던 아이히만의 너무도 명확한 고의성과 적극성.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을 때 아이히만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일이다.

이 의문은 물론 재판의 결과와는 상관이 없었지만 우리 중에 이런 의문 안갖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판사들부터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장에서는 아이히만이 학살이 자행될 장소를 견학하면서 마음에 (양심이 아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과정을 생생히 추적하는데 얼핏 보면 양심의 문제같은 것도 당시 독일 국민 전체에 희한한 정서로 전파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유대인 학살에 대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무심했지만 특별히 독일계 유대인에 대해서는 통탄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고들 한다.

그 이유는 독일계 유대인은 그나마 자신들과 교류하던 사람이었었고 또 독일계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들과는 수준이 높은 문화인이었다 이런 거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수준으로만 평가해서 약간의 동정심을 가졌을 뿐 그 외의 가스살인이나 무더기 총살 등에 대해선 무감각했다던 독일인들.

저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이란 사건 앞에 독일인들이 ‘양심’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더욱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학살을 당하는 피해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반응도 반응이려니와 학살의 집행자들에 대해서 가졌던 독일 엘리트들의 이 반응이란 (그마저도 소수였다 ) 자기네 독일군인이 어찌 그리 수준 낮을 수 있는가 뭐 이런 정도의 개탄 뿐이었다고.;;;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동시대 같은 인류에게 악을 저지른 데 대한 인류애적 혹은 민족적 회개와 통분이 아니라 자기네 게르만족의 수준이나 위신을 잃은 것 에만 초점을 둔 민망해함 딱 그것이었을 뿐이라니....

히틀러에 대한 반역 시도조차 인류의 도살자를 응징하고 정의를 바로세우고자 함이 아니라 독일이 망할 것이 두려워 자기네들의 궁여지책을 부릴 뿐이었다는 사실!

 

한나 아렌트가 이곳 6장에서 통렬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딱 하나다.

“국민 전체의 도덕적 붕괴.”(p 179)
이에 맨 마지막 장 필부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오늘을 사는 나와 모든 인간이라는 종에게 던지는 소름끼치는 거울이 될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잡히기 전에 총통께서 마련한 가스로 편안하게 죽으면 될 것을 )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싼 가스를 유대인에게 낭비해 버렸으니” (p 180)

 

 

제 7장 반제회의, 혹은 본디오 빌라도

 

6장 만큼은 아니지만 7장도 만만챦은 분량이다.

여기에선 아이히만이 그나마 일말의 양심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깨끗이 씻겨져 나갔고 그래서 그가 이제부터 학살에 어떻게 의지를 갖고 적극성을 띄며 임하게 되었는지의 계기가 밝혀진다.

내가 본 tvN <<요즘 책방>>에서 설민석이 전한 에피가 이것이다.

그리고 7장은 당시 독일 권력기관 내 정부요인들이 인종말살에 대해 어떠한 기류였는지도 드러내고 있다.

요점은 인종말살에 나치당원 비당원을 떠나 전 국가적 협력을 구축하기 위한 소위 ‘반제회의’ 그 운명의 저녁식사를 계기로 아이히만은 다시금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조직적 학살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짚었듯이 아이히만은 시오니즘 저서 달랑 두권으로 유대인들에게 아주 열린 태도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유대인 조직 지도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이 유대인 조직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책동에 어떻게 부역해왔는지도 소상하게 보고해준다.

그 중에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나치의 분열주의 책동, 곧 이간계이다!

이미 나치가 아이히만 같은 이를 활용한 것 자체가 그들의 술수를 잘 대변하는 증거일 것이다.

아이히만은 너무도 순진해빠진 얼굴로 유대인 조직의 리더들을 만나왔고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갖도록 친화력있고 유대사회에 지식이 많아 보이는 인물이었으니까.

아이히만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학살의 비수를 감춘 늑대같은 나치스들이라니!

그랬기에 교활한 나치스들은 독일 국민 안에서의 동요도 미연에 방지하고자 독일계 유대인, 비독일계 유대인, 그리고 독일계 유대인은 한 번 더 우수한 유대인, 수준낮은 유대인으로 갈라놓았다.

물론 이들의 운명은 결국 동일했다. 아우슈비츠......

 

그런 간계에 놀아난 유대인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나치스의 의도를 몰라서, 나중에는 자신들만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여 유대인의 명부를 나치스에 갖다 바치고 최종에는 직접 살인의 도구로까지 쓰이고 말았다.

 

이쯤에서 문득 놀라운 유대민족의 조직성.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에 가서든 그들 나름의 비공식적 조직을 꾸렸고 거기서는 역시나 전통적 방식의 원로들이 리더를 맡았는데 그들의 이 놀라운 조직력이 결국 그들 민족의 비극의 비의도적인 단초가 되었다는 점.

저자 한나 아렌트가 이 장에서 지적했듯이 유대인 학살은 독일과 독일의 괴뢰정부가 세워진 나라들에서는 이 유대인 조직들이 활용되어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량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정부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곳에서는 유대인 학살이 지지부진했다는 것이다.

결국 유대인은 총을 안들었음에도 총맞아 죽은 연합국 병사들보다 많이 희생을 당한 셈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평화주의적 태도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일까

2000년간 남의 나라에 ‘기생’하며 살아온 민족의 놀라운 협조성, 순응성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어리석다고 혹 비난할 수는 있어도 유대인들을 결코 경멸하거나 증오할 수는 없는 것!

혹 유대인이 보인 그 미련함에 대해서라면 그건 우리 모든 인간의 속성이지 특정 민족들 , 특정 인종이라고 나무랄 수 있을까?

아니,! 그렇다면 나는 독일을 그렇게 비난하련다.

이 장에서 우리의 주인공 아이히만의 마음을 학살의 무자비함에 대한 꺼림칙함으로부터 돌려세우게 된 ‘반제회의의 그 만찬장에서 나치당 뿐 아니라 당시 독일의 명망있는 엘리트 관료들도 아주 적극적으로 히틀러의 학살계획에 찬동했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의 부서에서 더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없을까 경쟁하는 분위기였다고한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 히틀러에 대한 반대 기류가 거의 소수였다는 분위기와 유대인들에 대한 동정들도 그저 자기와 친하거나 또는 자신들이 인정할 만큼 탁월한 엘리트들에 대해서나 소규모로 이뤄졌다는 점을 보면 독이 이 게르만 인종들도 정말 뭐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인종적으로 판정을 내리고 싶단 말이다!

 

아,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이 우글거리는 속에서

나도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어지던 시대의 이야기다!

한편으론 그것이 꼭 70여년 전의 일이기만 할까?

오늘날 나는 곳곳에서 제3제국 독일 민중을 사로잡은 광기를 본다.

우경화, 반민주, 반인권. 독점과 독식을 일반화하려는 부도덕한 집단의 안하무인함을.....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

 

8장은 여전히 이 양심과 법의 문제를 파고들고 있다.

이는 아마도 서양 근대 철학의 핵심 명제이지 않나?

중간에 아이히만도 칸트의 ’정언명법‘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더라고....

아니! 소크라테스부터 제기된 주제였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이렇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양심이다.

법을 지키고 위반하지 않는 것이 또한 양심의 일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었고

학살을 중지하는 것은 불법적인 짓이라고 확신했다는 것.

그래서 8장은 이 아이히만의 생각의 구조를 파헤치는 중이다.

이는 아이히만 뿐 아니라 독일 전체가 그렇게 사고했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저자가 말하기를 악을 잘 수행하는 방법을 잘 배웠기 때문이라고 (p 227)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만

아이히만이란 사람은 총통 히틀러가 법이고 종교였다고 한다.

때문에 패전이 임박해지자 히틀러의 주요 파트터였고 자신의 상관이기도 한 힘러 (이책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 가 보험차원에서 유대인 학살을 중지하는 것에 대해 분격하고 저항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유대인 학살에 의지를 가진 능동범으로 법정에서 공식 확정되었지만.

 

나는 이때 저자가 쓴 마지막 문단이 이해가 안된다.

해독 불능이다 ㅋ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는 비록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성향이 때때로 살인의 충동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한다고 추정하는 것가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땅의 법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학살의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3제국의 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악을 인식하게 되는 특질 ( 유혹이라는 특질)을 상실했다.
수많은 독일인들과 많은 나치스, 아마도 엄청난 수의 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똑지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려는 (유대인은 그들이 알고 있는 운명의 장소로 이송되었기 때문. 비록 물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소름 끼치는 세부사항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익을 취함으로써 이 모든 범죄의 공범자가 되지 않으려는 유혹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맙소사,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다. p 227

 

제 9장 제국으로부터의 이송: 독일 오스트리아 및 보호국

 

아직까지 아이히만의 경력속에서 히틀러의 유대인 정책들을 살펴보는 중이다.

그것들은 추방과 이주 그리고 학살이다.

그리고 최종 업무로 갈수록 아이히만의 위상과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학살자의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이 ’최종 해결책을 ‘을 수행할 때 또 한가지 결정적 업무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곧 이송이다.

별 다른 뜻 없다.

유대인을 짐짝처럼 이 나라 저 나라 옮기는 일이다.

진짜 화물을 대량 나르는 일도 전시에라면 더욱 복잡한 일이거늘

한번에 수천명 혹은 수만명 단위로 살아있는 화물을 수송하는 일에는 철도 배차 뿐 아니라 정말 많은 신경쓸 거리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화물‘에 대한 각종 서류정리( 국적 소멸과 재산 강탈을 위한 ), 보안 혹은 경비의 문제들이다.

그 모든 복잡 다단한 과정의 중심에 아이히만이 있었다.

물론 아이히만이 거물급이란 소리가 아니다.

고도의 숙련된, 집약적 역량이 요구되는 그 일에 아이히만은 정말 온 신경을 곤두세워 열성적으로 감당했다고 한다.

 

이 때에도 다시금 놀라운 유럽의 대 유대인 인식.

그리고 유대인들의 유럽에서의 지위와 형편이 지난날에는 어떠했었는가에 대해 역사를 배우게 된다.

 

나치는 유럽 제패의 야심을 가지면서 유럽을 하나로 묶을 키워드로 반유대주의를 노렸다고 한다.

실상은 히틀러가 기대했던 것 만큼 공공연하지는 않았더라고.

당연하지 않나!

반유대주의란 민족주의와는 다른 극도의 부정적 , 비이성적 정서다.

서유럽이 어떤 곳인가?

로크와 볼테르 , 칸트를 자신들의 소크라테스로 모시는 곳 아닌가.

이성. 합리. 오직 그런 것을 숭앙한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이 저급한 ’감정의 편향‘을 수용했을라고....

그러나!

인간은 원래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이 점은 나중에 뇌과학자들에 의해 속속 밝혀져온 진리다.

인간의 뇌는 이성보다 편견과 감정, 오류들에 더 편향되는 속성이 있다.

이것을 나는 신학계 전문용어로 sinful nature로 부르리라.

(내가 한 때 도대체 인간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의 화두를 붙잡고 방황하던 시절의 내게 해답이 되어준 말그대로 신탁이었다!)

나치스를 위시한 독일인들이 그랬다.

그들의 불만족은 이성에 통제되지 않았다.

실업, 공황, 국가의 위신의 손상이라는 위기 앞에서 독일 국민들의 상처받은 감정을 만져준 것은 나치였다.

그들의 언어도단적 선동이었다.

 

지금도 그들의 후예들은 곳곳에서 사람들의 불만과 찌질함에 기대어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 지극히 부정적인 주장과 편견들을 전파하고 있다.

거기엔 범죄의 합리화, 주객의 전도, 본말의 전도들이 있다.

특히 그놈의 PC와 일베는 한끝 차이일거라 확신한다!

 

지난 150년간의 유럽에서의 유대인들 이야기 계속

그 때가 지난 2000년간의 디아스포라의 세월 속에서 그나마 유대인들이 숨을 돌리고 산 세월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럽내 유대인인구는 나치 독일이 건드릴 수 있는 인원으로만 따져도 천만이 넘었다고 한다.

(거기서 최소 600만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종의 기원이 아니라 종의 멸망일 뻔했다고 ㅠㅠ)

어쩌면 유럽 문명에 유대인의 몫이 분명 꽤 많은 분량일 것이다.

 

암 이슈라엘 하이 (Am Yisurael Chai)

한 명이 죽었든, 일가족이 죽었든, 한 마을 전체가 학살당했든

어쨌든 민족은 살아남지 않겠는가 하는 슬픈 자조적 구호라고 한다 ㅠㅠ

 

이 슬픈 보고서가 15장에서 끝날려면 아직 멀었다 .

 

제 10장 ~ 제 12장.

 

이 세 개의 장은 독일의 직접적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국가들에서의 이송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서 9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도 깨닫게 해준 장들이다.

10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송이란 곧 학살과 동의어란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이송 정책에 다양한 혼선들이 있었는데 이송 정책에 담긴 학살의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당국자들의 실수’에 통탄해 하다가도

결국은 본뜻을 잘 알고서는 당국자들이 일말의 양심과 체면등으로 이송을 거부하고 나서는 모습들까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같은 조마조자함이 가득한 장들이었다.

 

총 11개나라들을 각 장으로 나는 기준은 지역의 구분이다.

 

제 10장 = 서부유럽 :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이탈리아

제 11장 =발칸지역 :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제 12장 = 중부유럽 : 헝가리, 슬로바키아

 

나는 여기에서 내 나름의 기준으로 새로이 분류해 정리하려 한다.

첫째, 이송의 실체가 어떠하였든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는데 소극적이었든 적극적이었든 나름 유의미한 성과를 보인 나라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덴마크.

당시 왕이 다스리던 나라였는데 왕부터 모든 관료와 민중이 헌신적으로 유대인을 보호하고 탈출에 협조했다. 이 사실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래서 눈물이 나온다.

그리고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덴마크로부터 탈출해 오는 유대인을 팔벌려 환영해 주었다.

 

이탈리아는 분명 독일과 동맹국이었고 2차세계대전의 전범국가였지만 엄연히 독일식 ‘전체주의 국가’와 그냥 ‘파시즘 국가’는 차이가 있었더라는 예시가 되었다고 한다. (p 257)

그렇기에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이 비극을 맞은 사례는 독일이 로마까지 진격했을 때 뿐이었다.

그때 독일은 이탈리아가 강제 수용하고 있던 7500명을 기존 이탈리아와의 협정까지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강제 이송하여 그중 6900명을 희생시켰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 유대인 인구의 1/10도 안되는 비율이라고 한다.

 

불가리아에서도 왕실과 민중이 한 뜻으로 유대인을 보호하는데 앞장선 노력들은 감동적이다.

심지어 당시 국왕은 유대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암살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련의 진주로 독일의 영향력이 종식되는 순간까지 유대인은 한명도 독일인의 이송과 그로인한 학살로부터 희생되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이제 앞의 사례와는 정 반대로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혹은 야만적으로 학살이 자행된 나라들이 있다.

가장 악랄한 나라는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루마니아는 전쟁전부터 유럽에서 반유대주의 가장 심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자체적인 강제수용소를 꾸렸고 학살도 어찌나 야만적으로 백주대낮에 자행되었던지 독일 게슈타포가 나서서 살인을 좀더 문명적인 방식으로 하도록 제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41년 여름의 끔찍한 에피소드 하나.

5000명의 유대인을 화물열차에 빼곡이 밀어 넣고는 그들이 모조리 질식할때까지 몇날 며칠이고 화물열차를 굴렸다고 한다. 여름이었다 !!!!!!!!!

아, 루마니아는 드라큘라의 고향이다 ㅠㅠ

루마니아를 책임진 제독 안토네스쿠란 이름을 잊으면 안되겠다.

그는 11만의 유대인을 자체적으로 청소하려고 했었는데 이일에 대해 독일 참모들이 나서서 저지하고 그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그를 협박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루마니아에선 30만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유대인들에게도 더는 구원의 소망이 없을 그때 엉뚱한 반전이 일어났다.

이 루마니아 학살자는 돌연 독일로의 이송에 대해 나치에게 협력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유대인장사 때문이었다.

각국의 유대인 구출단체들이 인당 거금을 들여 유대인의 목숨을 매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루마니아는 ‘전쟁기간에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유대인을 이주시킨 몇 안되는 나라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p277)

 

헝가리 : 이 왕도 없는 왕조국가의 섭정은 독일과 협정을 맺으며 80만 유대인의 완전 멸종을 획책했다.

그리고 거기 등장한 아이히만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특유의 무기, 곧 유대인 단체 구성과 그 지도부와의 기만적 교섭에 특화된 기술로 헝가리내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솎아내어 학살센터로 이송시키며 실적을 쌓았다.

아직 16만 정도가 살아남았을 때는 이번에 헝가리내의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세력들에 의해 무자비한 테러가 자행되어 또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슬로바키아는 가톨릭 정부가 그저 반유대주의에 근거해 자국내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데에만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유대인 이송에 ‘순진하게 ’ 협조한 덕에 5만 2000명이 이송되었고 그 끝은 가스실이었다.

나중에 이들이 이송의 본의를 알게 되고는 더 이상 나치에 협력하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예 독일에게 점령당한 후에는 독일이 나서서 또 1만 4000명을 추가로 이송시켰다.

 

그 외 나라들은 사실 앞의 루마나니아나 슬로바키아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따로 지적할 점은 민중의 자발적인 반유대주의 즉 반인륜적 정서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가슴아픈 것은 아이히만이 나서서 각 나라마다 유대인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을 통해 유대인을 통제하였으며 결국 사냥이 끝난 후엔 그들조차 삶아 먹었던 나치의 잔혹함 앞에 너무나 순진했던 유대인들, 그리고 그 비겁한 순응주의다.

유일하게 그리스계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폭동을 일으킨 사례가 있는데 이는 단 한명의 생존자만 남기고 끔찍한 비극으로 끝났다고 한다.

 

이렇게 9장에서 12장까지 네 개 권역별로 이송 실태를 살펴보았다.

이송과 개별 국가내에서의 집단 학살등을 포함하여 희생된 수치는 오늘날 소위 공식적인 수치라고 인정받는 6백만이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가 없다.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요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전 유럽에서 유대인의 멸절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한 민족에 대하여 이렇게 끔찍한 증오와 폭력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일개 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독일을 기점으로 국가적 시책이자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집단적으로 자행되었다는 현실.

아 1차세계대전때도 그렇게 인류의 지성 혹은 이성에 회의주의가 몰아쳤다고 했는데 2차세계대전은 그것보다 더욱 끔찍한 절망과 혼돈을 주었을 듯.

 

제 13장 동부의 학살센터들

 

이 장은 이제 아이히만의 경력과 희생유대인의 최종착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동부라함은 ‘ 폴란드와 발틱 연안국가들 그리고 독일이 점령하고 있는 러시아 영토’를 의미한다고 한다 (p 293)

내가 앞서 아이히만의 경력이라고 말했지만 실상 아이히만은 여기 동부유럽만 빼고 거의 전 유럽을 누비며 유대인 이송의 책임을 졌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이 장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첫째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민족의 원수 아이히만에게 이 학살센터의 책임도 지우려고 노력했던 이유다.

둘째는 여기서 생존자들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을 대표 타겟으로 정해 쌓인 한을 쏟아내는 과정속에서 민족의 공분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확실히 전쟁후 생존자 사회에서 히틀러 만큼이나 주적으로 널리 인정받은 사람이었던가보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재판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적으로 아이히만을 납치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정부는 신생 국가 이스라엘이 최고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가 되길 기대함과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의 민족의 원수에 대해서는 초법적 (실상은) 불법적 권한 행사도 불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검찰은 바로 그러한 민족적 국가적 사명을 띄고 아이히만의 치명적 학살죄를 적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많은 시도들이 실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저자 한나 아렌트가 초반에 인정한대로 이 예루살렘 재판부가 참으로 중립적으로 지혜롭게 검찰의 감정적 예단을 잘 컷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생존자들은 학살센터에서 아이히만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카더라’ 는 추정적 증거들을 대부분 기각했고 이로써 아이히만의 학살죄에 있어 동부센터에서의 죄에 대해선 대부분 부정될 수 있었다.

재판정에 있던 아이히만은 당시 이러한 법정 분위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였을 것이다. 검찰은 이것 저것 들이밀며 그의 유죄를 주장하는데 재판부가 오히려 피고를 두둔하는 듯이 검찰을 제지하였고 그 중거들의 허구성을 지적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판결문에서 아이히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집행되었고 말이다.

이런 면 뿐아니라 이 재판부에 대해서 놀라운 점은 당시 검찰조차도 독일 전체주의 국가의 고도의 복잡한 관료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아이히만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는데 재판부는 그런 구성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고 또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전 독일, 전 유럽에서의 메카니즘까지 꿰뚫으며 그 속에서 아이히만의 역할을 정확히 파학해 내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진정 전지하였기 때문에 나올수 있는 세련된 냉정함이었다.

휴~

오늘날 한국 재판부를 보면 이 질낮은 우리나라 암기왕 재판부에 대해 다시금 혐오감이 인다...

너무도 편파적이고 너무도 협소한 가치관, 인색한 책임의식 ...

우리 나라 재판부에게는 형법과 사법이 근거해야할 정신과 철학과 사상이 없다.

이런 자들이 나치의 전법재판을 맡았다면 지금도 그닥 좋은 소릴 못듣는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그때보다 더 편파적이고 인종주의적이며 반역적인 판결들을 자행했을 것 같다

아동성폭행범, 살인자들이 최소 20년도 못 살고 석방되는 현실.

명백한 범법자들을 옹호하며 검찰과 짬짜미하는 재판관.

판사나 검사 그만두면 유명 로펌에 스카웃되어 변호사로 개업해 부를 거머쥘수 있는 이나라...

판사 검사에 오로지 명예만이 최고의 보수가 되는 그런 나라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사법정의는 이 나라에선 아직은 멀다 ㅠㅠ

참 부러운 이스라엘 재판정이다 ㅠㅠ

 

제 14장 증거와 증인

 

이 장은 맨 첫장과 마찬가지로 이 세기적 재판정의 분위기를 증언하고 있다.

아이히만이라는 유명한 나치 전범의 재판에 사용된 증거와 증인의 특징들에 대해서다.

우선 증거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 유대인이 2000년의 한을 풀고 건국된 나라다.

특히나 반유대주의 나치 독일을 제패한 뒤에 세웠으니 나치 독일의 전범에 대해 가장 강력한 적대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 재판에서 피고측은 자신에 유리한 증거나 증인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나치 전범인 피고측 증인이라면 그들도 독일 나치 경력에서 자유로울수 없으니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에 대해서도 기소할 수 있다고 강경하게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대표변호사로 세워진 세르바티우스란 사람은 그저 돈 때문에 이 나치스트를 옹호하고 또 변호하게 된 것이다. 특히 증거자료를 취득하는 능력에 있어서 그의 변호인단은 미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찌되었건 피고입장에선 국가적으로 불리한 그런 재판이었다고 한다.

난 이렇게 기술한 한나 아렌트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럽다.

이건 정말 국가적인 범죄였고 전쟁범죄였으니 그 피고에 대해 계속해서 공정과 정의를 언급하는 건이야말로 어불성설아니겠는가

인도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이런 재판이 가능했던 이유는 어찌되었건 독일이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가 싸운 싸움이었고 한 나라가 패배하였기에 그에 관련된 모든 조치들이 나라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에 대해 공정성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저서에 나온 이런 한나 아렌트의 태도들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민족의 고향 이스라엘에서 배척받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증인들.

아이히만의 재판은 총 121회 공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121회 !!!!!

여기에서 피고측 증인은 이 책 읽는 동안에 1명인가 두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고측에서 증언대에 세운 사람은 피고 자신 곧 아이히만이었다!

아이히만은 검찰과 변호인측 양측에 의해 무려 33회나 심문대(혹은 증언대)에 섰다.

 

이쯤에서 당시 이스라엘 재판에 대한 새로운 사실 하나 발견했음.

재판이란 통상 검찰층 심문과 변호인측 반대심문이 이어지는데 여기 재판에서는 재판부가 따로 심문하는 공판도 있다고 한다.

내가 대한민국 법정을 잘 몰라서 그러는지...

아니 지금껏 보았던 어떤 법정드라마에서도 재판부 심문은 한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다.

 

아이히만 재판부에서 방청객에게 가장 파장을 일으킨 것은 증인들의 심문이었다고 한다.

이 증인들은 실상 재판에 그리고 그 판결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생존자들로 구성된 증인단들이 아이히만과는 어떤 접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121회의 공판기간 동안 무려 100명의 증인들이 법정에 출석했다고 한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증인 두명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첫째 증인은 1938년 독일에서 나치당원을 저격한 유대인 청년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 나치당원의 저격은 죽은 나치당원이 학살의 주범이나 종범 조차 안되는 오히려 유대인에 옹호적인 피해자였고 유대인청년은 실상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부대사실도 나로서는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그 아버지가 독일에서 강제이주를 당한 과정을 생생히 증언하는 태도 때문에 법정을 숙연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저 담담히 그러나 너무도 진실하게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증언에서 재판방향이 길을 잃건 말건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방청객들이 감동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증인은 아바 코브너인데 그가 안톤 슈미트라는 독일인 야전사령관을 언급할 때의 일이다.

이 독일인은 우연히 유대인 지하요원들을 만나 서류를 위조하고 군용 트럭을 제공하면서까지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그 유대인 유격대원중의 하나가 증인 아바 코브너였다.

당시 이 안톤 슈미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미 유명한 의인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증인이 안톤 슈미트를 언급할 때 방청객에선 어디선가 ‘쉿’ 소리를 시작으로 완전 정숙을 하였는데 마치 안톤 슈미트를 추모하기 위해 묵념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안톤 슈미트는 결국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장에서는 한나 아렌트가 결국은 사상가 혹은 철학가의 진면목을 드러낸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전문을 다 옮겨본다 . p 324에서 p325에 걸쳐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효하지 않다. (중략)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며 모든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 지구가 인간이 걱주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남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 이상의 것이 합리적으로 요구되지도 않는다

안톤 슈미트 하사나 품위있게 학살을 맞이한 유대인의 사례에서 보듯 공포 앞에서 인간의 행동동은 두 가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 학살책이 시행된 나라가 있고 시행되지 않은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뭐 이런 이도 저도 아닌 즉 너무도 무심해보이는 이 진술들.

그러면 학살책이 시행될 수도 있는 거지. 공포 앞에서 순응할 수도 있는 거지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그렇게 읽힐 수도 있는 문장들이다.

 

이제 마지막 장 제 15장만 남았다.

저자가 마지막에 공격적으로 던진 화두에 대한 답을 15장에서 찾을 수 있을것이라 기대한다.

 

제 15장 판결, 항소, 처형

 

드디어 마지막 15장이다.

그러나 내가 바로 앞 장에서 기대한 정답은 얻을 수 없었다.

한나 아렌트의 진술은 정말 매정할 정도로 무심하다. 담백함을 넘어 야박할 정도로 건조하다.

15장은 2장에서부터 전개 방식이 그러했듯 우선 아돌프 아이히만의 마지막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즉 패전 직전 아이히만의 업무와 패전후 독일에서의 탈출 아르헨티나에서의 체포와 재판 이후 교수형대에 이른 최종 결말까지.

 

앞서 이스라엘 재판부는 검찰의 민족적 정치적 의도를 분쇄하고 다시 피고를 옹호하는 듯한 중립적 객관적 자세를 취했다고는 했는데 그렇기에 나온 판결문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1961년 6월 29일 첫 공판이 시작된 이래 그 해 말 12월 11일에 재판부는 판결문을 낭독했다.

이 역사적 판결문도 전문을 옮긴다 .

[ 우리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범죄의 경우처럼 엄청나고 복잡한 경우, 즉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그리고 다양한 행동방식으로 참여한 경우 범죄를 저지르도록 자문하고 유혹했다는 일상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범죄들이 희생자의 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개입한 사람들의 숫자의 측면에서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

굵은 글씨체가 적용된 문장은 실제 책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이히만이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고 아무도 직접 죽인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던 것이고 실제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 버튼을 누른 이는 나중에 본인들도 희생되었던 유대인 피해자측 당사자들이었다.

 

아이히만은 곧 항소했지만 항소 재판은 초심 재판보다 빨리 끝났다.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은 아이히만의 가족뿐만 아니라 세계각처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편지들을 받았다고 한다.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고 항소 판결후 이틀뒤 아이히만은 처형된다.

그리고 교수대에 선 순간까지 아이히만은 당당했고 쇼맨쉽도 부렸다.

그 자리에서 아이히만은 ‘잠시 후면 우리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만세 ,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유언같지 않은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여기에서 저자 한나 아렌트는 앞서 번역자 들이 서두부터 제시한 그 논쟁적 어휘로 이 장을 마무리한다.

저자가 진정으로 주장하고 싶은 이 모든 이야기의 교훈, 바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에필로그와 후기

에필로그는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함께 기록된 내용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저자가 뉴요커라는 잡지사 특파원으로써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올린 당시 기사를 다시 추려 만들었고 이에 대해 에필로그를 추가하며 책을 냈다.

 

 

어찌되었건 에필로그와 후기 모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둘러썬 모든 법리적 정치적 논쟁을 거론하며 작가의 주된 논지를 본문보다 더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특히 에필로그 마지막 장을 이해할 수 없다.

전반적으로 작가의 문제 혹은 번역체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같다.

진짜 이 책의 문체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고전을 했는지 모른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거긴 그저 모르는 인물과 지명들의 바다이기 때문에 망망대해에 갇힌 듯한 암담이었을 뿐이었는데

이 책은 아예 미로다!

나는 내가 읽은 문장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이 말은 번역이 잘못된것이지 않을까 싶은 문장도 두 어개 발견했다!

번역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확인받고 싶다.

그래서 에필로그 마지막에 엄청난 분량의 인용문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정황상 실제 판결문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대로 이런 판결문이었으면 나았지 않을까하는 예시문인 것 같은데..확실치가 않다.

아, 무슨 영화를 보자고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정성껏 읽고 또 정성껏 정리하고 있는가 ^^;;;;

하도 오랫동안 이 책에 묻혀 지내다보니 내 문체도 닮아가는 듯하다.

나 이런 문체 싫어하는데....... 넘 어렵지 않나....

난 어렸을때부터 만연체의 내 작문이 싫었다.

 

아무튼 저자가 정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제기한 논점은 세가지다.

수동적 속인주의,

보편적 재판권

속지주의......

네 네.

대학시절 교양으로 법학개론을 들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법학과 나는 맞지 않아!!!ㅋ

그러나 단 한가지만은 나를 격분케 했다.

한나 아렌트는 에필로그에서 자연스럽게 이 세기의 재판에 대한 세간의 세 가지 공격을 언급했다.

첫째는 소급법에 의한 재판이란 것과 승자의 법정이라는 논리.

둘째는 피고가 불법적 납치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셋째는 아이히만의 범죄가 유대민족에 대한 범죄로 기소된 것이기에 그를 재판할 법정은 국제 재판소라는 논리였다.

나는 이번에 두 번째로 언급된 그놈의 ‘승자의 법정‘ 논리에 또 한번 성질이 난 것이다.

막말로 난 침략자의 학살도 방어적 소행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침략자란 으레히 침략국에서의 미지의 적들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될 테니까!

그런 기준에서라면 미군의 베트남 양민학살 , 한국전쟁 당시 북한, 남판, 심지어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도 유대인 학살보다는 인간적이었다.

최소한의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되었건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비유한 평가일뿐이다! 학살은 반인륜적 비인간적 범죄다!)

그러나 유대인 학살은 전쟁기간이었다고는 하나 전투가 진행되지는 않았던 나라들에서도 일상적이고 조직적이며 무엇보다 합법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

진실로 그래서 아이히만같은 죄인을 양산한 반인륜 범죄라는 사실!

때문에 이는 승자의 법정이네 어쩌구 하는 논리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승전국이 되어 이런 재판이 가능하게 된 것에 인류의 운명을 걸고 감사해야 할 진보주의의 승리로 정리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이 머리로만 인류애를 생각하는 반인륜주의자들!

 

마지막으로 후기.

후기는 이 ‘재판보고서’의 의의와 목표에 대해 아주 자세히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내가 내 지난날의 인생의 화두에 대해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가 제시하는 대답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6장에서 가졌던 의문에 대한 해답도.

 

이 책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심각한 재난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 전체주의에 대한 설명이나 제3제국 시절의 독일 국민의 역사를 다루는 것도 아니며, 끝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 이 책은 악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연구도 아니다.’p 389

‘이 재판이 오직 정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이루어져야 했다는 의견을 갖고 ’ 재판을 방청했으며 이 보고서를 썼다고 저자는 말한다. p390

 

그래서 재판을 통해 이룰 정의가 과연 무엇이길래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일단 뒤로 미루고!

 

우선 피고에 대하여!

워낙에 전례가 없는 범죄이고 피고이다보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두고 갖은 역사성, 정의正意들이 난무했다.

그러다보니 재판정의 피고는 아이히만이라는 한 개인, 고유의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 독일인 일반, 또는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 , 또는 근대사 전체, 또는 인간과 원죄의 본질’(p390)으로 주장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이 주로 무기로 삼았던 ‘국가의 행위였다’는 논리와 ‘상관의 명령’이었다는 논리를 필두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한참을 논박했다.

결국 저자의 관심은 어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죄책감, 부채의식 이런 문제가 아니라 법이란 죄를 지은 당사자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

그것을 정의의 실현으로 보고 있다는 것

 

덕분에 나도 사법적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게 되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근원이 무엇인가 매우 심도있게

헤치는데 여기에 양심, 이성 혹은 사회적 추세등 다양한 것들을 하나하나 공박한다.

 

국가의 행위와 상관의 명령이란 논리에서 이스라엘 재판부는 양심의 소리라는 근거를 들어 피고의 주장을 물리치고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고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나중에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비논리적 법적용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래서 저자는 진정한 양심의 문제는 무엇인가?

인간의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가의 철학적인 문제까지 파고 들어가는데

 

저자는 그래서 전후 독일 기독교계가 유대인 학살에 자신들 독일민족의 방관 등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 죄책감, 책임감의 문제도 피상적으로 종족적 , 민족적 대표성을 빙자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반대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대표성의 개념에 대한 최고의 논리 곧 기독교상 인간은 다 죄인이란 논리도 반박하고 있다.

저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책에서 여러번 언급되기도 한 바 모든 사람이 죄인인 곳에서는 누구도 죄인이 아니다란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라고.

 

그런 피상적인 죄책감과 연대의식을 벗어버리라.

다시한번 강조하건대 아렌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명확하게 책임자를 규명해서 법에서 정한 법정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이 사법적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피해자를 위한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다.

이런 법이 잘 적용되려면 징계효과가 있어서도 아니라고 한다.

그냥 법정이 그런 곳이다!

법정에 서면 어떤 역사성을 띈 인물이건,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작디 작은 톱니바퀴 같은 존재밖에 안된다 평가할 지라도' 법정에 서면 즉시 법죄의 수행자, 즉 (개별) 인간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p 393)

 

그 때 다시 한번 언급되는 ’악의 평범성 ‘논리.

아이히만은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

그가 희대의 범죄자가 된 것은 미련하거나 어리석다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순전한 무사유‘.

그래서 이 재판의 정의를 통해 ’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런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라는 그저 단순한 ’교훈‘이 남을 것이기 때문에

재판에서 사법적 정의를 이루는 게 그토록 중요했다고.

 

 

사회는 고도로 발전해가고 각 개인이 갖게 되는 권한과 책임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넓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또 다른 아이히만이 등장하지 말란 법 없다는 면에서 한나 아렌트의 우려는 옳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회는 결국 나 한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일진대

내가 혹 아이히만 같은 위치에 있다면 나 또한 그와 같은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미처 실감하지 못하는 실상에 대해 깨어있지 못하다면,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사고하지 못한다면 나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

한편으로 저자가 공박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원리를 옹호하자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나 역시 사법적 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죄인 개념만큼 인간을 과학적으로 정의내린 개념은 없다고 본다.

나치 독일에서만큼 끔찍하게 장기화되고 고도로 내면화된 전체주의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우리 역사의 1212당시만 들여다 보면 어떻게 그 몇 개 군단의 쿠데타에 수도를 지키고 있던 대다수의 정규 부대가 그리도 쉽사리 저항을 포기하고 전두환에게 항복할 수 있었는지..

그 짧은 몇시간의 시간에, 실제 전투로 대면한 것도 아니기에 총구가 눈앞에서 옥죈 것도 아니었음에도 상황 돌아가는 것에 그냥 그 무도한 무력에 그냥 주저 앉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정말이지 그냥 짐승과도 같아.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거야.

인간은 그래서 당근과 채찍이 필요한 양이나 당나귀같은 근성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몇 명 있겠지. 그러니까 성인군자라고 하지.

하지만 성경속에서도 유일하게 완벽한 이는 오직 예수 뿐이었고 예수가 인정한 유일한 위대한 인간은 세례 요한이었는데 그조차 믿음을 저버릴까 했을만큼 유약한 모습 있었다구

성경속 그 많은 믿음의 선진들 중에 찌질하고 비겁하고 간악한 죄악들을 저지르지 않은 이들 없다구.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생 막대기라고 했지.

세상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그러니까 교도소도 가나안 가는 광야같은 역할을 할 거라고 봐.

그걸 한나 아렌트가 알아주었으면 한다네 ......

근데 이걸 오는날 우리 나라 사법부는 모르고 있다고!!

사시만 붙으면 다야? 암기만 잘하면 다야?

성범죄자가 어떤자인지 도대체 인간에 대해 뭘 알기나 하는지?

성범죄자? 불쌍하지 하나님이 사랑하시겠지!!!...지옥가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니까!!!

그런데 성범죄자가 성범죄를 끊기가 쉬운 일인줄 아나?

인간이 중독에서 벗어나는게 그게 껌 뱉듯이 쉬운 일인줄 아는가?

어떻게 단 20년도 못살리고 세상밖으로 내 보낼 수 있느냐고?

 

우리나라가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라고 하는 평가에 자랑스러워한적도 있었다만

이스라엘이 오늘날 한나 아렌트 등을 위시해 세계로부터 그토록 무리한 재판이라고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아이히만을 정죄하려했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입장이다 보니

아이히만이 교수형대에 서서 어리석은 멘트 날리는 광경이 하나도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게 놀랍기는 하였다네...

30년전에 태수는 저 군부독재자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목이 졸렸다고.........부디 더는 떨지 마시오~~~~~

아, 교수대가 낭만적으로까지 보이기까지 하다니............

 

드디어 길고 길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달리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뒷정리만 남았는데 이것도 한보따리일 거 같다 ㅠㅠ

 

상투어나 관용어 등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현실--사유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 p 22. 역자 서문 중에서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야기는 이론과는 달리 현실의 힘을 반영하는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이야기는 구체와 보편의 양 측면의 힘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어떤 이온이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지를 검증 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p 23. 역자 서문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이 현존재의 실존의 표지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며, 어떤 ㅅ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의 진정성을 입증한다. p 29. 정화열 교수의 소고에서.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행위의 능력이다. p 30


인간은 어머니가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날에 단 한차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탄생을 해야할 의무를 부여한다. p 31


(아이히만이라는 )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 37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저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p 37


상투어, 관용구, 관습적이고 표준화된 표현과 행위 규칙의 고수 등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막아주는, 즉 모든 사건과 사실들이 발생함으로써 일으키게 되는 우리의 생각하는 주의를 막아준다. p 37


아이히만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p 39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p 39


차이란 인간관계에서 관용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반면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 것 . p 39. 마이클 월처의 말 중에서


모든 관계는 자아와 타자의 비대칭적 차이와 더불어 시작한다. p 39


아이히만은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도덕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다. p 40
모든 사람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 p 42 . p 381


전쟁은 폭력적 형태의 정치 p 42 카를 클라우제비의 말 중에서


우리는 전쟁에 마취되어 버렸거나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p 42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기술이 우리를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만들ㅇ고 있다. p 42


미디어는 우리를 더욱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만든다. p42 . 이상 정화열 교수의 소고에서


지구는 인간 조건에 있어 핵심적 본질이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구의 자연은 인류에게 노력하지 않고도 또 도구가 없이도 움직이고 숨쉴 수 있는 주거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에서도 독특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세계는 인간 실존을 모든 단순한 동물적 환경으로부터 분리시키지만, 생명 자체는 이러한 인위적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며 , 인간은 생명을 통해 모든 다른 살아있는 유기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 p 43.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 정화열 교수의 소고 주석에 인용


, 독일이여
그대의 집에서 울려나오는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비웃는다.
그러나 그대를 보는 자마다 자기의 칼을 찾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p 47


아이히만은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란 점을 기억했다.
그 명령이란 곧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으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p 78


이 영혼의 희극 뒤로 전문가들은 그의 경우가 법적인 이상 상태는 물론 도덕적인 이상상태도 아니라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내놓고 있다. ,p 79


분명 허풍은 언제나 그의 가장 큰 죄중 하나였다. p 83


그러나 아이히만의 구체적이고 결정적 결함은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p 104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무능력함과 많은 상관이 있음이 분명해진다. p 106


8000만명으로 이뤄지닌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p 109


세르바티우스 : 유골의 수집, 종족 근절, 가스를 사용한 살인,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선 아이히만은 무죄입니다
판사 : 가스 살인을 의학적 문제라고 말한 것은 말실수 같은데요?
세르바티우스 변호사 : 실제로 의학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의사가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살인의 문제이고 살인 역시 의학적 문제입니다. p 131.
: 언어의 객관성이란 비인격성 곧 비 인간성을 뜻한다 ㄷㄷㄷ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
진실, 모든 진실, 오직 진실만을 p 196


특권적 범주들을 수용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보면 아주 재장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외이기를 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 규칙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p 205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종전 무렵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 것은 그의 광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p 223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위해 단 한 살마이라도 항살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p 324


나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p 343


희생자가 유대인인 한에서는 유대인의 법정이 재판하는 것이 옳고 적절하다.
그러나 그 범죄가 인류에 대한 범죄인 한, 그 범죄를 심판하는 데는 국제 재판소가 필요했다. p 370


항구적인 국제 형사재판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각인시킴으로써 유대인의 학살이 앞으로도 있을 수도 있는 여러 형태의 대량학살의 예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p 371


어떠한 처벌도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는 충분한 억지력을 가진 적이 없었다.
반대로 일단 어떤 특정한 범죄가 처음으로 발생한다면 그 범죄의 재출현은 처음보다 훨씬 가능성이 높다.
인구 폭발과 기술발전, 잉여 인간, 핵에너지 등등등이 그 이유다.. p 375
우리는 오직 피고가 한 일에만 관여할 뿐입니다. p 382


피고가 이 지구를 유대인과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고 그 일을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구성원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당신이 교수형에 처애져야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p 382

 

 

유대인이 곧 제거되는 것은 당 고위직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다 “ (p 149)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라고 번역했어야 하지 않을까? ^^;;;